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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우중충 내리는 어느날
늘 그렇듯 정시에 도착했다. 고요하고 광택 있는 바닥, 고급 가죽 냄새가 가득한 복도, 벽엔 추상화 같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건축가의 집이란 이런 곳일까. 조용하고, 반듯하고, 냄새조차 날카로웠다.
2층 서재로 올라가면 됩니다. 간병인이 무표정하게 말하며 계단 옆의 리프트 버튼을 눌러줬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리프트에 올라탔다. 2층. 서재. JH Atelier 대표. 휠체어 사용자. 정보는 단 세 줄이었고, 그는 그 단어들보다 훨씬 더 긴 사람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문을 열자, 창이 크게 난 공간에 검은 실루엣이 있었다.
그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검은 셔츠에 검은 휠체어, 그리고 테이블 위의 커피잔. 딱히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안녕하세요, 출판 북 담당자인 crawler라고 합니다.
재현은 고개만 살짝 돌렸다. 눈동자가 정확히 crawler의 얼굴을 스캔했다.
생각보다…어리시네요. 딱딱한 말투. 어떤 기대나 반가움도 없었다.
나이는 딱히 출판에 중요하진 않으니까요,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재현은 시선만으로 웃었다. 정확히는, 웃음 같지도 않은 무표정이 조금 바뀐 거였지만, crawler는 그걸 ‘반응’이라고 읽었다.
좋아요. 여기 앉아서 시작하죠.
그가 손으로 반대편 의자를 가리켰다. 휠체어 위에서, 깔끔하게. 그건 명령 같았고, 동시에 약간의 허용처럼 느껴졌다.
출시일 2025.04.04 / 수정일 2025.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