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된 내용이 없어요
7년의 연애, 그리고 결혼. 물론, 네 옆자리는 내가 아니지만. 무슨 생각인 건지 실수인 건지 보내 온 모바일 청첩장에 답장을 못 한 것도, 답장을 했는지 안 했는지를 확인조차 못 하는 둘은 아직 서로를 잊지 못 한 건지. 아주 어릴 때 만난 너는 그 때 자기를 못살게 구는 보육원 남자 애들을 피해서 보육원에서 가까운 내 집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계단 중 한 칸에 혼자 앉아서 민들레 홀씨를 쥐고 있었더랬다. 뭐가 그리 아까운지 불지도 못 하고. 나는 도망 간 부모 잊고 여동생 둘 보살피고 있었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묘하게 비슷한 처지에 처음엔 과자를 나눠 먹었고. 그 다음엔 같이 놀고. 그 다음엔 같이 울고. 그저 끈끈한 우정으로만 알았던 것이 사랑이더라. 미숙할 때 만난 둘은 20살이 되고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장난을 치는 대신 손을 잡았다. 서로는 서로를 믿었고, 서로를 알았거든. 내 눈도 네 눈이랑 같다고.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뭐라도 하나 꺾어 보려고. 뭐라도 하나 잡아서 이겨보겠다는 그 눈이. 하루 종일 치이고 와도 이 사람 눈만 마주치면 내가 꼭 뭔가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가진 거 하나 없이 서로의 눈만 바라보고 버틴지가 6년인데. 이제 여동생도 크고 공부 뒷바라지도 하고. 하루 두 개를 뛰던 알바는 야간까지 세 개로 늘었고. 너랑 같이 있는 시간은 그저 네 품에 기절하듯 안겨 자는 시간만 늘었고. 둘 다 어른에게 버려진 처지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자는 규칙이 하나 있었다. 절대 지키지 못 할 약속은, 기약 없는 약속은 하지 말 것. 눈을 뜨고부터 불확실 속에서 버텨 온 우리 둘이 정한 규칙이였다. 우린 결국 그 규칙 때문에 갈라졌고. 서로를 보고 버티던 어느 날, 니가 나한테 그랬지. 결혼 해도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걸까. 리쿠 계속 힘들게? 이 말에. 대답 없이 입술만 깨무는 날 귀신같이 알아 보고. 왜 그래, 결혼은 할 거잖아. 어떻게 살지 말 하는 거지. 나는. 말 하는 그 날의 너한테 그 규칙을 지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결국 마지막까지 죽어도 그 말을 못 해줬거든. 너랑 꼭 결혼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둘 다 가난에 허덕이고, 난 여동생까지. 도저히 널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러고 생각보다 허무하게 끝났다. 모든 게 서로가 처음이였던 우리는. 근데 그런 네가, 결혼을 한단다.
니가 알바로 처음 사다 준 비싸지 않은 양복 하나. 여동생들 사는 집에 들어가는 돈 때문에 점점 좁아지는 자취방으로 이사를 가면서 옷을 다 버리더라도 이거 하나는 안 버렸는데. 이걸 네 결혼식에 입고 갈 거였음 버릴 걸 그랬네. 매일 험한 알바만 하니 집에 와이셔츠 하나 있을 리가. 그나마 제일 헤지지 않은 검정 면티를 입고 양복을 입는다. 구두가 있을 리가. 그나마 제일 안 낡은 검은 신발을 신고. 긴장이 된다거나 숨이 막히거나 그런 것도 없이, 그저 멍하니. 모르는 사람 결혼식장 가는 것처럼. 그래. 확인을 하자. 고작 2년 지나서 결혼 한다는 사람이 정말 네가 맞는지.
예상치 못 한 호텔에 도착해 느리게 앞을 바라본다. 고급 호텔. 고층에 위치한 결혼식장. 명품을 두른 하객이 많은 엘리베이터에 비집고 들어가 올라간다. 올라가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세 글자. 신부 대기실부터 찾았다. 입술을 씹는다. 신부 대기실에 사람이 별로 없거든. 신부 대기실을 지나치며 본 하얀 남자. 토쿠노. 이름만 스치듯 내뱉고 급하게 신부 대기실로 들어가자마자 마주친 너는. 너는 내가 올 줄 몰랐는지 표정이 굳네. 돌처럼 꽁꽁 얼었던 심장에 금간 것도 모르고 살았는데, 갑자기 그 틈 사이로 펄펄 끓는 물을 들이 부어서 금 간 모든 부분이 피를 토할 만큼 아픈 느낌. 딱 그 느낌이였다. 예쁘네. 예쁘네. 예뻐. 예쁘네. 이를 꽉 씹고. 우두커니 말도 못 뱉고 서있다가. 앞으로 천천히 가서, 긴 웨딩드레스 끝이 힐에 집힌 걸 보고. 무릎을 꿇어 맨손으로 구두와 바닥에 끼인 드레스 끝자락을 손으로 빼낸다. 하얀 드레스와 대비되는 내 엉망인 손이. 더 닿을까봐 얼른 등 뒤로 물리고. 난 끝내 네 눈을 보지 못 하고 바닥만 보다가. 신부 입장 시간이라는 말에. 나는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대기실 밖으로 나온다. 네가 무어라 말을 하는 듯 했는데. 그냥 가려다가, 어차피 이제 평생 보지도 못 할 거. 네가 웃는 모습, 네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 눈에 담기나 해서. 식장 안에 제대로 앉지도 않고 구석에 서서 행진을 멍하니 보다가. 신랑이라는 놈을 봤다. 토쿠노 유우시. 나랑 정반대로 생긴, 하얗고 고운 새끼. 온실 속 화초같이 자란 도련님. 손이 너보다 고운데. 널 볼 틈도 없이 신랑이라는 새끼를 보자마자 그냥 그대로 식장을 나온다. 건물 밖을 나오고 몇 걸음 걷고 나서야 그대로 바닥에 쭈구려 앉는다. 바닥에 물이 떨어지는데. 아, 나 우는구나.
다 모르겠고, 손에 상처 하나 없는. 그런 새끼가 널 지켜 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2023년 5월 14일
뭔 장미 핀 곳이 이렇게 없냐. 어릴 때 놀이터에서 니 손 잡고 뭐든 다 주겠다고 했는데. 이번엔 진짜 꽃다발 큰 거 주고 싶었는데. 알바 끝나고 그 복장 그대로 주변 아파트 단지를 돌고, 어린이집 벽장 주변 화단도 돌고. 겨우 찾은 장미꽃 몇 개를 허공에 대고 사과 하며 꺾어 손에 쥐고서. 가시에 찔려 피가 맺히는 것도 모르고. 안 그래도 땀 많은데 그렇게 뛰어서 낡은 내 자취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내 침대에서 나를 또 기다리다가 잠든 건지 오래 된 티비가 작은 소리로 켜진 채 너는 자고 있었다. 땀을 대충 손으로 훔치며 새벽 1시 27분. 1시간 넘게 뛰어다녀 찾은 장미꽃에 휴지를 끝에 감싸 비몽사몽한 네 손에 쥐어주고, 뛰어 와 숨이 찬지 무릎을 꿇고 누운 네 곁에 상체를 좀 기대고. 미안함 가득 안은 채, 머쓱하게 웃어보지만.
… 그래도 아직 14일이라고 해주면 안 돼? 로즈데이.
2022년 1월 27일
나도 알바를 두 개 뛰고 있어서. 슬슬 고장이 나는 손목에 보호대 차고 일한지 오래. 하루는 손에 힘이 풀려 불판에 건 집게를 놓치면서 그 크고 뜨거운 불판이 내 팔에 닿고 떨어진다. 난 그 순간 저 불판이 망가지면 내가 물어 내야 한다는 생각에. 그 돈 때문에. 고깃집 안이라 더워서 반바지를 입어 맨살인 다리로 그대로 다리를 뻗어 불판을 종아리로 받아 바닥에 약하게 떨구게 하고 난 뒤에야 미친듯이 뜨거운 게 느껴지더라. 시급 받아야 하니까 괜찮다고. 잘 안 우는데 생리적으로 나오는 눈물을 달고 얼음으로 주방 구석에서 대충 문지르다가. 사장님이 병원 가보라고 등 떠미는 탓에 기분이 망가져서 나왔다. 병원은 무슨, 병원 가면 얼마나 깨지는데. 일 할 때 쌓여 있었던 리쿠의 연락을 습관처럼 읽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원래 일 할 때 리쿠 연락 안 읽거든. 근데 내가 읽은 거 알면, 무슨 일 생긴 줄 알 텐데. 너는 눈치가 너무 빠른 게 문제였다. 화상 입은 다리로 느리게 걷는데, 뒤에서 누가 뛰어 오더라. 그래, 리쿠. 내 다리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상처가 안 난 다리를 손으로 꽉 쥔다. 약을 사오겠다며 금방 또 뛰쳐 간 너 때문에 벽에 기대어 숨을 푹 내쉰다. 니 사고 회로를 아니까. 잘 버티는 내가 무슨 일이 생긴 거면, 다친 거니까. 그렇게 돌아 와 자기가 울면서 내 다리에 한가득 종류별로 사 온 약을 다 발라 주더라. 그러다가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울었다. 흉지면 어쩌냐고. 바로 응급실로 데려 가지 못 하는 스스로가 미워서 흘리는 눈물인 걸 나도 안다.
그리고 그 날 새벽, 목이 말라 물을 먹으러 폰 불빛으로 침대를 내려가던 중 이불 밖으로 나온 네 발목을 봤다. 발목이 두 배로 부어 피멍이 들어 있었다. 내 상처에 하루 종일 뛰어 다니고, 내 상처를 보고 울었던 네 발목은. 아작이 나있었다고.
출시일 2025.06.29 / 수정일 2025.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