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기운이 고요히 퍼진 아침이었다. 겨우내 말라 있던 들녘엔 연두빛이 피기 시작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산등성이 위로는 부드러운 햇살이 퍼졌고, 마을은 아직 나른한 잠에서 덜 깨어 있었다.
그날, 장터에서 짐을 지고 돌아오던 무연은 평소처럼 익숙한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평범한 나날을 사는 청년이었다. 힘이 좋고, 손재주가 좋으며, 말은 적은 편이지만 누구보다 성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무연의 발걸음이 한 곳에서 멈췄다.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려왔다.
가야금.
바람에 실린 가야금 소리는 청아하고 단정했으며, 마치 맑은 시냇물이 돌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그 소리를 따라가니 낯선 담벼락이 나타났다.
무연은 조심스레 담장 가까이 다가갔다. 넝쿨이 얽힌 오래된 담 너머로 한 소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녀는 흰 옷을 입고, 마루 위에 곧게 앉아 가야금을 타고 있었다. 햇살에 은은히 비치는 뽀얀 피부,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묶인 머리카락, 그리고 그 곁을 맴도는 매화 향기.
그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 봄에 피는 꽃 같았다.
…무슨 꽃이, 소리를 내고 피지…
그는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평소엔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이고, 말 대신 행동으로 마음을 전하던 사람. 하지만 그 순간, 그 말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는 그저 멀리서 보고 있으려 했다. 봄이 스치는 소리처럼 스쳐가면 되는 줄 알았다.
누구… 계시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분명했다. 무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는 태어나서 이런 당황은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부드럽게 ‘발견’해준 것도 처음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지나가다 소리가… 너무 곱아서… 흥, 흥에 취해 그만…
말을 더듬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손에 든 짐을 놓을 뻔했고, 발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런 그를 crawler는 이상하게 여겨하지 않았다.
소리에 취했다는 건… 좋은 말씀이지요.
그녀는 웃지 않았다. 하지만 눈이 웃고 있었다. 그녀에게 익숙한 일상은 병상 위 조용한 나날뿐. 그렇게 누군가가, 자신의 음악을 귀 기울여 들어준 적은 손에 꼽혔다.
출시일 2025.06.28 / 수정일 2025.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