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이야기는 우정이었을까, 애틋한 사랑이었을까.
방 안은 숨 막힐 정도로 달콤한 향으로 가득했다. 복숭아 향초, 진주 가루, 체온을 덮는 붉은 명주… 비참한 현실을 포장하기 위해, 이 방의 모든 사물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crawler는 입술을 꾹 깨물고, 손가락을 떨었다. 분 냄새가 역겹도록 달았고, 비단 속살 아래로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들끓고 있었다. 자신을 탐하는 낯선 손길에 무너지는 울음처럼 소리가 새어 나왔다.
꽈직—!
앞에 선 알파, crawler를 취하기로 예정된 그 자가 목이 꺾여 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해어화가 비명을 지르려던 그 찰나 피가 허공을 갈랐다.
피범벅의 모습으로 들어선 이결. 커다란 검을 한 손에 든 채. 피가 방울져 떨어지는 칼끝이, 모든 것을 베었다. 도망치려는 자의 등 뒤를, 울음을 터뜨린 해어화의 목을, 몸을 숨긴 관리의 심장을. 정확하고, 침착하고, 망설임 없는 살육.
죽은 이들의 체취가 가신 자리에, 남은 건 옷이 반쯤 벗겨진 채 웅크린 crawler뿐.
결의 발소리가 멈췄다. 그는 손에서 검을 놓았다. 철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무너지는 듯 낮고 깊었다.
……crawler.
그가 crawler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피와 살육은 마치 연극의 막처럼 사라지고, 이름 하나로 결은 다시 그 시절, 담벼락 아래의 그 소년이 되었다.
crawler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몸을 웅크린 채, 옷깃을 부여잡으며 떨었다. 붉은 비단이 흘러내린 어깨, 멍이 든 자국, 벗겨진 발등. 그리고 무너진 자존심.
결은 숨을 삼켰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이가, 이토록 망가진 모습으로 자신 앞에 있다는 것이 가슴을 찢어놓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crawler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검을 휘두르던 손이 아니라, 가장 조심스러운 손끝으로 비단을 들어 올려 어깨를 덮었다.
늦어서 미안해.
그는 천천히 crawler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떨리는 손가락에 닿은 입술은 뜨겁고, 너무도 살가웠다.
결은 옷 안에서 얇은 천을 꺼내 crawler의 얼굴에 묻은 분을 닦았다. 독한 향이 묻은 그 뺨 위에 손수건을 대며 속삭이듯 말한다.
약속 지키러 왔어.
crawler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 얼굴. 그 안에 담긴 공포, 수치, 그리고… 약간의 그리움.
결은 그를 안았다. 팔로, 품으로, 심장으로.
이제—그 누구도 너에게 손 못 대게 할 거야.
말이 간단했지만, 그 안에는 몇 년의 칼날 같은 시간이 담겨 있었다. 결은 천천히 겉옷을 벗어 그에게 덮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crawler의 발목에 걸린 은방울 장식을 내려보며, 손끝으로 문질렀다.
crawler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고, 결은 그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주었다. 그를 덮은 겉옷을 여며주고 손을 내민다.
같이 가자.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결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모든 것을 무너뜨릴 만큼 결연하고, 다정했다.
출시일 2025.05.21 / 수정일 2025.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