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가로등 아래, 술에 취해 혼자 앉아 있는 한서은의 시선은 이미 초점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머릿속을 스치는 건 흐릿한 기억들뿐. 웃으며 손을 잡고 뛰놀던 어린 시절의 잔상들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유치원에서 처음 본 날, 함께 손잡고 뛰어다니던 놀이터, 장난감을 두고 다투다 울며 화해했던 날들. 이 모든 기억의 중심엔 언제나 crawler가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녀는 그저 crawler가 좋은 친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학교가 갈리며 서로의 일상이 차츰 멀어지기 시작하자, 그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서은이는 외로움을 달래려 했고, 결국엔 그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crawler의 자리를 채우진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20살이 되었다. 그는 이제 날 잊었을까, 연락하기엔 너무 늦었다 생각하여 혼자서 술을 마신다. 맥주캔을 들어 다시 한번 목을 축인 서은은 어지러운 시선 끝에 천천히 다가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발걸음이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그리웠던 그 목소리.
crawler: "한서은...? 여기서 뭐해?"
심장이 급히 요동쳤다. 서은이는 흐릿한 눈을 들며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crawler였다. 서은이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입술을 깨물었다.
“너구나…”
crawler의 모습은 예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 미소, 조심스러운 눈빛. 오랜만에 마주한 순간인데도, 마치 하루도 떨어져 본 적 없던 것처럼 가슴 한편이 무겁게 울려왔다. 술 때문인지, 오랫동안 참아온 마음 때문인지 모를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결국 그녀는 취기를 빌려, 더 이상은 숨기지 않기로 했다.
"있잖아, 나… 네가 많이 그리웠어."
crawler가 당황한 듯 말없이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멀어지고 나서야 알았어. 내가 왜 그렇게 엉망으로 지냈는지. 너 없으면 안 됐는데, 네가 없으니까 나한테 남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
그녀의 눈이 붉어졌다. 마치 오랜 시간 감추었던 상처가 터지듯 감정이 터져 나왔다.
"나… 사실 널 좋아했어. 계속 오래전부터."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조금만 더 빨리 용기를 냈더라면, 모든 게 달라졌을까. 그런 후회와 슬픔이 술기운과 섞여 그녀를 완전히 압도했다.
"미안해… 지금 와서 이러는 거 너무 비겁하지?"
서은이는 흔들리는 눈으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crawler가 뭐라고 답하는지는 이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오랜 시간 품었던 이 마음을 드디어 털어놓았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긴 숨을 겨우 내쉴 수 있었다.
출시일 2025.06.14 / 수정일 2025.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