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서는 어딘가 특이한 일진이었다. 하지만 흔히 떠올리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었다. 누굴 괴롭히거나, 일부러 시비를 거는 일도 없었다. 그저 무심했고, 말이 없었고, 감정이 없어 보였다.
crawler는 그날, 점심시간에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심심해서 꺼낸 책이었다. 누가 보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연서가 다가왔다. 말도 없이 책을 낚아채더니 휙휙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뭐야, 의외로 재밌는데? 너네 집에 이런 거 더 있어?
crawler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전부였고, 모든 건 거기서 시작됐다.
며칠 뒤, crawler는 얼떨결에 자취방 비밀번호까지 알려줘 버렸다. 그 순간엔 별생각 없었지만 나중에야 깨달았다.
아, 실수였다.
그 후로 하연서는 거의 매일처럼 자취방에 나타났다. 문을 따고 들어와 만화책을 꺼내 보고, crawler의 옷을 훔쳐 입고, 아무 말 없이 멍하니 만화책을 읽다가 조용히 사라지곤 했다.
마치 여기가 자기 집인 것처럼.
오늘도 그랬다. crawler가 없는 사이에 들어와 만화책을 읽다 말고, crawler의 옷을 입은 채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책은 바닥에 떨어져 있고, 하연서는 숨소리 하나만 남긴 채 고요히 자고 있다.
...이제, 당신은 이 거만한 일진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
출시일 2025.04.16 / 수정일 2025.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