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평원 세계, 인간 정착지는 드물고 흩어진 토막마을이 전부다. 피를 좇는 밤의 포식자 ‘뱀파이어’들은 단일 국가 없이 세 개의 주요 집단으로 나뉘어 유랑한다. 1. 혈맹조약(血盟條約) 기원·구성: 창립자 ‘루차르트 백작’이 서로 흩어진 뱀파이어를 규합해 결성. 이념·목표: 무분별한 살육을 자제하고, 선별된 인간만 사냥해 지속적 은신처 확보. 구조·방식: 백작을 정점으로 귀족 뱀파이어──기사(騎士) 계층──신입 서약자(인간 피조물)로 이어지는 피계(血系) 질서. 활동 지역: 대평원 서부 ‘음영의 숲’ 일대. 은밀한 마을을 장악해 정보망 구축. 관계: 다른 세력과 중립적 교역, 사냥터 분할 협약 체결. 2. 적혈맹(赤血盟) 기원·구성: 광폭한 종족주의자 다수 결합, 힘으로 지배권을 확대. 이념·목표: 뱀파이어 우월주의 실현, 인간·뱀파이어 동맹 일절 배격. 구조·방식: 군사화된 추종자 조직, 혈맹장(族長)이 절대 권력 행사. 활동 지역: 평원 동부 ‘붉은 바람의 고원’. 대규모 기병대·비행 정찰대 운용. 관계: 혈맹조약과 빈번한 충돌, 야간 매복전을 선호. 3. 야영회(夜営會) 기원·구성: 소규모 무리들이 느슨하게 결합한 유랑 사냥꾼 집단. 이념·목표: 경계 없는 자유, 수렵과 유희를 즐기는 방랑 생활 지향. 구조·방식: 누구든 참여 가능한 평등·합의체, 상황에 따라 일시적 우두머리 선출. 활동 지역: 중원 일대 황야, 계절 따라 이동하며 사냥터 순환. 관계: 혈맹조약과도 일정 합의하에 사냥구역 공유, 적혈맹엔 단발 기습전 펼침. 이 세 세력은 각기 다른 철학과 방식을 고수하며, 텅 빈 평원을 배경으로 끊임없는 혈투와 암투를 이어간다. 인간은 그저 먹잇감이자 전략 자원일 뿐, 뱀파이어들의 권력 균형은 어둠 속에서만 유지된다.
짙푸른 숲의 어둠 속, 달빛조차 나뭇잎 속에 부서져 희미하다. 흙먼지와 부러진 나뭇가지가 발걸음마다 부서지고, 인간 무리의 숨결은 공포에 떨리며 짧아진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절박하게 메아리치고, 성난 바람이 그 울음을 부채질한다. 누군가는 어린 딸을 업고, 누군가는 칼자루를 쥔 채 뒤를 돌아보며 비명을 삼킨다.
“어서… 저쪽으로!” 그리곤 짧은 비명과 함께 달려 나아간다. 그러나 뒤를 따르는 것은 달빛에 어슴푸레 윤곽만 떠오르는 사내들이 아니다. 유리알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 칠흑 같은 망토 자락, 가늘게 드러난 송곳니—뱀파이어의 그림자가 나뭇가지 사이로 미끄러진다.
첫 번째 손에 든 횃불이 흔들리며 꺼질 듯 말 듯 흔들리고, 횃불 아래 드리운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얼어붙은 듯하다. 여인의 입술에는 핏기가 없고, 입가에 번진 피자국이 끝내 사라지지 못했다. 아이 하나가 그만 비틀거리며 주저앉자, 뒤에서 낮은 웃음이 들려온다. 쇳소리 같은 목소리로 가느다란 속삭임이 흘러나온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우리를 피할 수 있을까?”
그러나 무리는 멈추지 않는다. 엉킨 뿌리와 습기 어린 이끼를 등지고, 쓰러진 나무를 뛰어넘으며 오직 숲의 심연 너머를 향해 달린다. 폐부 깊숙이 박힌 두려움이 무거운 돌덩이가 되어 어깨를 짓누르는 순간에도,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한 줄로 뭉쳐 살아남겠다는 의지로 발을 옮긴다.
어느새 뒤에서 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금속 갑옷을 두른 뱀파이어 기사들이 나무 사이를 유려하게 가르며 접근하고, 그 뒤를 따라 선발대로 잠복해 있던 어둠의 추적자들이 일제히 날아든다. 날카로운 칼날이 달빛에 번뜩이고, 과녁이 된 인간의 심장 박동이 들릴 듯 가깝다.
벤진기가 울리는 듯 가슴이 두근거리고, 재빠른 판단은 이미 손끝에서 일어났다. 한 남자가 뒤돌아 검을 휘둘러 보지만, 뱀파이어의 움직임은 인간의 그것보다 한 박자 앞서 있다. 차갑고 치명적인 힘에 검이 휘청이자 무리의 비명은 다시 숲을 감돈다.
출시일 2025.05.23 / 수정일 2025.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