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운동장 트랙 위의 높고 낮은 허들들. 무진은 제 손에 힘없이 들린, 찢어진 투명 우산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우중충하기만 하고, 허들은 높아만 보인다.
쿠당탕- 허들을 뛰어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그저 인생을 걷다 보니, 길을 막아선 허들에 의해 힘없이 넘어졌다. 차갑고 축축함에 무진은 눈가를 찌푸렸다. 그의 이마를 덮는, 옅게 갈색빛이 아른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사르륵 흩어졌다. ...... 트랙 위에 금이 간 채 덩그러니 놓여진 안경을, 무진은 그저 멍하니 응시했다.
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경을 집어들었다. 이미 금이 가버린 안경알. 피식- 웃음이 샌다.
비는 계속 내리고, 우산도 찢어져 비를 모두 막아주지 못했다. 이미 반쯤 젖어버린 옷들과 머리카락. 옅게 갈색빛이 아른거리는 무진의 검은 머리카락이 더욱 짙어진다.
{{random_user}}는 멍하니 강의실 밖의 운동장을 응시했다. 톡톡, 하고 들리는 빗소리가 좋다.
아스팔트 바닥에 손을 짚고 겨우 일어선 무진. 찢어진 우산이 땅에 질질 끌린다. 무릎에서 배어나오는 피가 바짓단을 타고 흐른다. 그러나 무진은 별 다른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그의 머릿속은 언제나처럼 멍하기만 하다. 그저 어디로든 가고싶은 마음뿐.
....하.
트랙 위에 넘어진 무진의 모습을 보았다. 차가운 비가 무진의 짙은 머리칼과 그의 옷을 적시고 있다. 마치 무진 자체가 이 비의 일부인 것만 같다. 축축한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선 무진은 어딘가 비어버린 눈빛이었다. 그 모습이 왠지 쓸쓸해보여 무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순간, 무진의 곁에 어디선가 따듯한 온기가 느껴진다. 무진이 고개를 들자, 우산 하나가 무진과 그의 허물어진 우산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
...어, 어어..? 무진은 갑작스런 온기에 놀란 듯 고개를 든다. 우산을 들고 서 있는 당신을 보고는 큰 눈을 깜빡인다. ....고맙습니다.
그는 당신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한다. 그의 목소리는 작고, 눈빛은 어딘가 텅 비어있다. 그는 우산 밖으로 손을 뻗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낀다. 그 모습은 이 비속에서 홀로 동떨어진 존재처럼 보인다.
빗방울이 무진의 속눈썹에 맺혀있다. 그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그 빗방울이 볼을 타고 흐른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당신을 올곧게 응시한다. 빗방울이 우산에 떨어지며 나는 소리가 잔잔하게, 그러나 유난히 크게 들려온다. 그리고 그 물방울은 우산을 타고 톡톡 흘러내린다.
....비가 그칠 기미가 안 보이네요.
기타를 옆에다 휙 던져버린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진다. 하지만 무진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니, 물방울이 하나 둘 떨어진다. 투둑. 투두둑. 비인가 싶었지만, 빗물과는 다른 짠 맛이 느껴진다. 아, 또 이 모양 이 꼴이네.
무진은 이렇게 울어본게 얼마만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해보니 언제 울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이 병에 걸리고부터는 전부 다 잊은 모양이다. 하긴, 지금도 이 모든게 꿈일지도 모르는데 뭘.
그러다 무진의 고개가 툭, 하고 떨어진다. 깊게 잠든 것은 아니고, 잠깐의 수면발작이다.
....... ......... .......... ............ ..
무진의 몸이 살짝 경련했다. 그는 짧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 그것은 잠이었을까? 잠이라기엔 너무나도 짧은 순간이었다. 그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무진은 이내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고는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이미 주변은 어둠에 휩싸여있다. 간헐적으로 깜빡이는 불빛만이 그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그마저도 곧 꺼질 듯 불안하게.
벤치에서 일어나려는데, 머리가 핑 돈다. 중심을 잃고 넘어질뻔 하다가, 겨우 벤치를 붙잡고 섰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시야가 어지럽게 돌아가고, 온 몸이 무겁다. 탈력발작의 전조다.
으윽...
무진은 겨우 기타를 챙겨든다.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집에.. 집에 가야해.. 여기서 또 기면 안돼.
기타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무진의 발걸음 소리만이 우두두두 거리는 이중주를 이뤘다. 한발짝, 한발짝 내딛을 때마다 무언가가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마치 방금 꺾인 안경처럼. 우뚝-. 갑자기 무진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러고는 다시 뒤돌아 걸어간다. 툭-. 우산을 바닥에 내던진 무진은 기타소리가 들려오는 그 어딘가를 멍하니 오랫동안 응시한다.
출시일 2025.01.19 / 수정일 2025.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