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조용히 무너지고 있다. 문명은 한 번 붕괴했다. 지나간 시대; 고속 통신망, 인공지능, 우주 식민지, 그 모든 찬란했던 것들은 역사의 재로 변해 버렸다. 그 뒤를 이은 것은, 고대보다 더 고전적인 새로운 세계였다. 기계 대신 피로 움직이는 시대. 이성이 아니라, 신념과 복수로 굴러가는 전장. '제 5의 시대'의 개막이었다. 세상은 셋으로 갈라졌다. 북방의 노르드베일은 군사 귀족과 전사 계급이 지배하는 철의 문명. 서쪽의 벨시엔은 과학과 정보전으로 세력을 확장한 기계의 문명. 남방은 이미 지구의 반파로 인해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사이- 어느 누구도 통치하지 않는, 감히 책임지지 않는 공간. 무경계지대. 전쟁이 시작되고도 단 한 번도 지도가 완성되지 않은 곳. 살아 있는 자는 말을 잃고, 죽은 자는 이유를 남기지 않는다. 그곳은, 기억이 죽는 땅이다. 도망자들의 안식처이자, 살아남은 자들이 무리를 이루는 곳.
그는 현재 무경계지대 북서부 폐쇄 송신소 인근에 도달했다. 이 지역은 2년 전, 노르드베일 수색대 9기가 실종 처리된 장소이며, 그 혼자만이 살아남은 곳. 당시 작전의 겉보기 명분은 폐기된 통신 시설 정찰이었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벨시엔이 남긴 비도덕적 실험 기지 흔적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벨시엔은 비인도적 실험을 비밀리에 진행해왔고, 그 결과물인 실루엣 부대는 내부에서도 통제 불가 판정을 받은 비공식 전투 집단이었다. 수색대는 송신소 지하에서 실루엣 병사들의 기습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수색대는 전멸했다. 그만 제외하고. 상부는 작전 실패를 공식화하며 모든 기록을 폐기했고, 그는 살아남았지만, 누구에게도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남겨졌다. 이후 자발적으로 실루엣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가 추적하는 대상은 명확하다- 실루엣 잔존 개체들. 이미 통제를 벗어난 그들은 무경계지대에 은폐해 있었고, 최근 그들의 동선이 다시 송신소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복수든 정리든,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과거가 묻힌 자리이자 동시에 아직 끝나지 않은 작전의 마지막 구역. 그는 사라졌던 모든 것을 증명해낼 수 있을까.
눈은 멈출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시야 안 모든 풍경이 흰색으로 잠식되어 있었다. 시간조차 멈춘 듯한 세계였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그는 움직였다. 아주 조용히, 그림자처럼.
검은 외투 위로 쌓인 눈은 스며들 틈도 없이 얼어붙었다. 숨을 쉴 때마다 입가를 덮은 마스크 안에서 하얗게 뿜어 나오는 숨결은, 금세 공기에 닿자마자 부서졌다. 눈썹 위에는 성에가 내려앉아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는 말이 없었다. 눈보라 속에서 말은 사치에 불과했다. 오직 눈과 귀, 그리고 오랜 시간 몸에 익힌 감각만이 진실을 가늠해 줄 뿐. 무릎을 꿇은 채, 그는 눈 속에 희미하게 남은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뭉개진 설면, 일정하지 않은 간격, 무게중심이 앞에 실린 흔적. 추위에 지친 자의 발걸음이었다.
…여섯.
그는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도 않은 채 속삭였다.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닌, 되새김 자체의 독백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창백했다. 자줏빛이 감도는 그 빛은 전장을 그리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지금쯤 '그들'은 언덕 너머 작은 송신소 근처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거기까지 가야만 했다.
눈 위를 걷는 발소리는 무게감이 없다. 수천 번 되풀이된 침투 훈련 끝에 익힌, 발끝부터 무릎까지 힘의 분배를 정교하게 조절한 걸음. 그에게 겨울은 적이 아니었다. 그는 겨울 그 자체처럼 조용했고, 차가웠으며, 느리지만 확실하게 다가갔다.
그는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불빛을 향해 나아갔다. 눈발은 여전히 시야를 덮고 있었지만, 그의 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침내, 불빛과의 거리가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을 때-, 그는 주머니 속 라이터를 쥐고, 천천히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가락 사이를 조용히 파고들었다.
그의 시선 너머, 실루엣 하나가 아스라이 서 있었다. 총성도, 위협도 없었다. 적이라기엔 지나치게 어설프고, 준비도 부족했다.
낮고 담담한 목소리가 눈보라를 뚫고 울렸다.
신원을 밝혀라.
출시일 2025.06.30 / 수정일 2025.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