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아침이었다. 느지막이 눈을 뜨면 짧은 생 대부분을 함께한 사랑하는 사람의 단정한 이마가 보이고, 손을 뻗으면 평생 닿지 않을 거라 여겼던 온기가 품에 안겨 왔다. 뽀얀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침대에 누운 서해영의 예쁘장하게 말린 입꼬리가 쭉 찢어지며 환한 웃음이 걸렸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반듯한 이마와 얼굴이 햇살 아래 환하게 빛났다. 붉게 호선을 그리는 입술에서 해원이 사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을 두어 번 끔벅거린 서해영은 해원을 조그맣게 불렀다.
"해원아."
분홍빛으로 물드는 하얀 뺨과 고른 이, 긴 속눈썹을 사랑했다. 실없이 웃는 것도, 변하지 않는 포근한 향도 사랑했다. 눈을 맞추려면 고개를 살짝 들어야 하는 큰 키도, 근육이 보기 좋게 붙은 몸도 사랑했다. 서해영이 주는 안락함, 편안함과 안정을 사랑했다. 서해영이 핸드폰을 두드릴 때면 누구와 연락하는지 궁금했다. 서해영이 어떤 친구를 사귀고, 어떤 생활을 하는지 궁금했다. 서해영은 맨날 자신이 먼저 연락한다며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바쁜 일상 속 틈만 나면 휴대폰을 들여다봤고, 괜히 귀찮게 굴면 알아챌까 봐, 싫어할까 봐 가만히 연락을 기다렸다.
그게 사랑이 아닐 리가 없다. 서해영과 연애를 해 보고 싶었다. 감정의 교류나, 그런 간질간질한 것들.
손가락 끝으로 덜덜 떨리는 해원의 턱을 툭 건드린 서해영이 입꼬리를 당기며 씨익 웃었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잘 생각해 봐. 이게 맞는 거야."
"내 생각나서 안 간 거지? 좋아해서. 그치?"
"좋아한다고 해 봐. 응? 그래서 안 간 거라고 해 봐."
집요한 물음이었다. 두 손안에 담긴 얼굴을 억지로 비틀기 무섭게 엄지가 찢어진 입술을 거칠게 문질러왔다.
"응? 해원아, 빨리."
"네가 시작했잖아."
서해영은 항상 저런 식으로 말을 했다. 애매하게, 모호하게.
"해원아. 나 기다렸잖아······."
얼굴을 뒤덮고도 남는 손이 해원의 창백한 뺨을 탁탁 두드렸다. 힘을 뺀 손이 뺨을 밀듯이 때릴 때마다 머리가 장롱에 가볍게 부딪혔다.
"······해원아."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뒤통수로 올라왔다. 늘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떨림을 가라앉혔다. 오랜 기다림 끝에 터진 붉은 입술이 갈라지며 단조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되게 뻔해."
서해영은 해원의 손을 잡고 손가락을 하나씩 들어 올렸다.
"연락 무시하는 거, 놀러 오라 할 때 안 오는 거, 말 안 듣는 거. 이거만 안 하면 돼."
곧게 뻗은 세 손가락을 한 손에 움켜 쥔 서해영이 이것을 기억하라는 듯이 살짝 흔들었다.
"우리 이러면, 괜찮아질 거야. 이게 맞아."
자상하다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손길을 건넨 서해영이 웃음기가 남은 입술을 달싹여 꺼낸 답은 때아닌 헛웃음을 불러왔다.
"우리 비긴 거네?"
그리 말하는 서해영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산뜻했다. 촘촘한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기다렸잖아."
"응, 해원아."
"숨 쉬라고, 해원아. 똑바로······."
구부러진 허리가 더욱 낮아지며 보드라운 입술이 귓바퀴를 스쳤다. 가느다란 바람 소리와 닮아 있는 목소리였다.
"난 네가 이럴 때마다 너무 좋아. 나밖에 없는 것 같잖아."
"나 아직 좋아하잖아······. 맞지?"
나긋하면서 강압적인 속삭임의 기저에는 의심과 확신이 공존하고 있었다.
"윤해원 예쁘지? 윤해원 말 잘 듣지? 윤해원 내 말만 들어. 윤해원 나 없으면 못 살아."
서해영은 작은 바다를 만들었다. 어항을 바다 라고 착각할 수 있게끔 조금씩 스며들었다. 허락한 사람 몇 명만 넣어 주고, 여과기를 돌려 불순물을 걸러내고, 해수염을 뿌려 바다와 같은 염도를 맞추며 물잡이를 했다.
학비를 걱정하지만 굶어 죽을 걱정은 하지 않게, 쉬지 않고 일하지만 신고 다니는 운동화 값은 월급의 두 배를 넘게, 인사하는 친구는 있지만 기댈 어깨를 빌려주는 친구는 없게.
해원에게 말투를 바꾸라면 바꾸었다. 이 옷을 입으라면 입었다. 오라면 왔고, 가라면 갔다. 자연스럽게 손을 벌렸고, 순진한 얼굴로 웃었다. 무슨 짓을 해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눈빛이 제게 닿을 때면 이상야릇한 도취감이 들었다. 그 도취감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누구나 손댈 수 있지만, 누구도 허락 없이 넘어서는 안 되는 무언의 선이 예상치 못한 놈에게 침범당했을 때.
그게 처음이다. 윤해원은 모르는 기점.
서서히 입꼬리를 끌어 올린 서해영이 미소 지었다. 지독하게 예쁜 웃음이었다. 해원이 넋을 놓고 바라보는 사이 자유로운 손이 뻗어와 뒷덜미를 끌어당겼다. 서해영은 벌벌 떨면서 울기만 하는 해원을 달래듯 가볍게 입을 맞추고 구멍이 숭숭 난 머릿속에 믿음직한 이야기들을 집어넣었다.
"우리 멀쩡해. 알겠어? 우리 괜찮은 거야. 우리 옛날부터 서로 좋아했던 거야. 다 정상이야."
"우리 좋아하는 사이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괜찮아질 거야. 우리 괜찮아."
"해원아."
"알겠어? 알아듣겠어?"
"윤해원."
"무슨 생각 해?"
"해원아. 똑똑하게 굴어."
"모르는 척 하니까 끝까지 들이더라."
서해영이 고백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계속 말했잖아. 네가 잘못한 거야. 처음부터, 전부 다."
긴 속눈썹이 엉켰다. 색색거리는 숨결이 입술을 스쳤다.
이마를 마주 댄 서해영이 고요히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얌전히 굴어."
"해원아, 넌 그러면 안 돼."
출시일 2025.06.21 / 수정일 2025.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