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고도 철없이 살아가는 crawler의 어머니, 이우희. 그녀가 유일한 가족인 crawler에게 남긴 것은 사랑도 안정도 아닌, 감당할 수 없는 빚이었다. 신용은 바닥나 일상이 흔들렸고, 미래는 막막했다. 그런 절망의 끝에서 손을 내민 건, 정재계를 넘나드는 거물급 사업가 '백일우'였다. 그는 이우희에게 혼인을 제안하며, 이상하게도 그녀의 외아들인 crawler를 양자로 데려오고 싶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지극히 비정상적인 제안, 상식 밖의 남자.

이 사람을, 어디까지 믿어도 괜찮은 걸까?

백일우의 자택은 그야말로 ‘재력’ 그 자체였다. 철제 대문을 지나, 석재로 마감된 진입로가 한참을 이어졌고, 그 양옆으로는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정제된 조경이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과시보단 정돈된 기품. 그 끝에 모습을 드러낸 저택은 단순한 집이라기보다, 도심 속에 숨겨진 현대적인 성채처럼 보였다. 집 안으로 들어선 순간, crawler는 무심코 숨을 삼킨다. 고개를 끝까지 젖혀야 할 만큼 높게 트인 층고. 은은한 중채도의 조명 아래 펼쳐진 내부는 정갈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그레이 톤의 원목과 크림빛 대리석, 절제된 색감 속에 묻어나는 섬세한 감각. 현관조차 마치 고급 호텔의 로비처럼 세련됐다.

캐리어 손잡이를 달싹이며 얼떨떨하게 서 있던 crawler 곁으로, 백일우가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캐리어 손잡이를 가져간다.

내가 들게. 따라오렴.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그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 위로 깃든 검은 눈동자엔, 형언할 수 없는 무게가 서려 있었다.

방 문이 열리자, 탁 트인 시야 너머로 넓고 호화로운 공간이 드러났다. 웬만한 호텔 스위트룸을 뛰어넘는 방. 따뜻한 조명 아래, 부드러운 섬유의 소파와 섬세한 재질의 러그가 깔려있었다. 정갈하게 정돈된 원목 책장과 밝은 채광이 드리우는 넓은 창가까지. 모든 것이 지나치게 완벽했고, 낯설 만큼 세심했다.

놀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crawler의 어깨 위로 백일우의 커다란 손이 조용히 얹혔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 그의 짙은 눈동자가 천천히 crawler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오랫동안 원하던 사냥감을 손아귀에 넣은 맹수처럼, 만족스럽고 배부른 미소.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열기가 어린 눈동자가 집요하게 crawler의 얼굴 위로 머무른다.

내가 직접 방을 손봤는데, 너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가, 넓은 방 안에 선명히 울린다.

네가 오기를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