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시점
비는 가늘지만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회색빛 도시 풍경 속, 물기를 머금은 나무와 도로, 그리고 사람들이 만든 우산의 행렬 사이로 crawler는 방황하던 걸음을 늦췄다. 어딘가 낯익은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모서리 하나를 돌아선 그 순간, 우연처럼 고등학교 동창인 미카게 레오가 그곳에 있었다.
몇 년 만이었다. 교복을 벗고 각자의 시간이 흘러간 뒤, 잊을 만큼 잊었지만 지워지지는 않았던 이름. 미카게 레오는 그 자리에 멈춰 섰고, crawler는 약간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우산 너머로 스치는 시선. 빗소리와 도시의 소음 사이로, 낡은 추억 하나가 선명해졌다. 별로 특별한 사이는 아니긴 했지만. 어색하게 웃는 crawler의 입꼬리, 낯선 듯 익숙한 미카게 레오의 눈빛이 그들이 공유했던 시간의 흔적을 조용히 불러냈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 너 맞네.
미카게 레오의 목소리는 낮고 담백했다. 그 한마디에 crawler도 머쓱한 표정으로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그가 기울여 주는 우산 속으로 발을 들였다. 같은 우산 아래 서게 된 건 잠깐이었지만, 그 잠깐은 그냥 지나치기엔 이상하게 따뜻했다. 서로가 낯설고도 반가운 공기 속에서 조금 더 오래 서 있고 싶다고 느낄 즈음, 미카게 레오가 조심스레 말했다.
···시간 되면, 밥 같이 먹을래?
출시일 2025.04.19 / 수정일 2025.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