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승은 단 한 번도 왕의 자리를 탐한 적 없었다. 자신이 섬겨야 할 형님을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였으며, 제게 있어 유일한 의지처였기에 태승은 철저히 그림자처럼 살아가며,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살아왔다. 그저 평범한 사내들처럼. 그날도 태승은 저잣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그날따라 어두웠던 하늘에서는 이내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그가 허겁지겁 가까운 처마 아래로 몸을 피하며 옷자락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던 중, 낯선 목소리가 그의 귀를 울렸다. “차갑습니다, 나으리.” 비에 젖어 흐트러진 머릿결과 작은 얼굴에 자리한 또렷한 이목구비와 다르게 수수한 옷차림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당신의 모습에 태승은 시선을 거둘 수 없었고, 그 순간 떨어지는 빗소리가 멀어지며 이내 고요가 깃든 듯, 그 자리엔 태승과 당신 두 사람뿐인 듯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태승과 당신은 이따금씩 마주하였다. 당신의 흔들림 없는 곧은 마음씨와 자신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눈동자, 다정하고 따스한 말투가 좋았고, 당신 또한 태승의 편견 없는 눈빛과 맑은 웃음,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 좋았다. 연모였고 애정이었다. 하지만 태승은 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알 수 없는 까닭에 형님의 심신이 병약해지기 시작하였고, 왕위를 잇는 자로 태승 이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마침내 원치 않게 궁으로 돌아간 태승은 세자의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당신과의 만남 또한 점점 어려워지며 끝내 둘의 인연은 끊어지고 말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태승은 아직도 당신을 잊지 못해 빈을 옆에 두고도 허공만을 바라보는 일이 잦았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내관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를 맞으며 한참을 서 있곤 했다. 오늘도 비가 내렸고 여전히 비를 맞으며 궁 안을 거닐던 태승의 발걸음이 문득 멈추었다. 당신이였다. 비록 궁복을 입고 있었으나, 태승은 처마 끝에 서서 비를 피하고 있는 그날의 당신 모습을 단번에 알아 불 수 있었다.
그날과 같은 당신의 모습에 가슴이 일렁였다. 여전히 올곧았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태승은 자신도 모르게 당신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복이 모두 젖는 것쯤은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말이다.
당신의 앞에 다다른 태승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고, 당신이 그런 태승의 시선을 피하며 등을 돌리자 그의 고통에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러한 권세는 단 한 번도 탐한 적 없었소. 다만 그대와 더불어 평온하고 화목한 삶을 누리고자 했을 뿐이오.
그날과 같은 당신의 모습에 가슴이 일렁였다. 여전히 올곧았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태승은 자신도 모르게 당신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복이 모두 젖는 것쯤은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말이다.
당신의 앞에 다다른 태승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고, 당신이 그런 태승의 시선을 피하며 등을 돌리자 그의 고통에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러한 권세는 단 한 번도 탐한 적 없었소. 다만 그대와 더불어 평온하고 화목한 삶을 누리고자 했을 뿐이오.
한참을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태승을 마주 보며 조심스레 몸을 낮추고, 정중히 예를 갖추어 답했다.
소인은 더 이상 아뢰일 말이 없사옵니다. 부디 소인에게 더는 마음 두지 마시고, 저하의 자리로 돌아가시옵소서.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두 손을 단정히 모으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시야에 깊이 박혔다. 당신의 품격 있는 자세와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어찌하여 내게 이리도 서늘할 만큼 거리 두는 것이오…
서운함이 밀려왔지만, 곧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자 당신의 태도가 단박에 이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승은 쉽사리 당신을 놓을 수 없었다. 손을 뻗어 닿고 싶었으나, 그 거리는 더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태승은 당신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당신의 가느다란 턱을 조심스레 감싸 올렸다. 손끝에 닿는 온기, 그러나 동시에 스스로가 저지를 행동에 놀라듯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의 시야에 가득 들어오자, 이성은 사라지고 오직 당신만이 남았다. 가느다란 떨림조차 없는, 담담하면서도 차가운 그 눈빛이 가슴을 더욱 옥죄었다.
이대로 그대를 보낸다면, 필시 평생을 후회할 것이오.
목소리는 떨림 없이 낮고 깊었으나, 담긴 절실함만은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이토록 그대를 원하고 아끼는데, 어찌 그리도 모질게 등을 돌리는 것이오. 내 비록 세자의 자리에 앉아 있으나, 그것이 어찌 벼슬이며 영광이겠소. 내겐 차라리 굴레요, 족쇄일 뿐이오.
태승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을 놓아주어야 한다는 이성이 간신히 그를 붙잡고 있었으나, 그녀가 더없이 멀게만 느껴져 마음은 더욱 애달팠다.
태승의 간절한 목소리에 나는 끝내 버티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오래도록 참아왔던 감정이 둑이 무너지듯 쏟아졌다. 가슴 깊숙이 묻어둔 애달픔과 절망이, 그의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옵니다. 저하께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입술을 깨물었다. 서러운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이토록 가슴이 찢어지는데도,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참담한 마음을 안고 두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마지막 청을 올렸다.
그러니… 부디 소인을 스쳐 지나가 주시옵소서.
숨이 턱 막히도록 애원했다. 차라리 잊어달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내달라고.
간청드리옵나이다… 저하.
태승은 무릎 꿇은 당신을 향해 조용히 손을 뻗었다. 떨리는 어깨, 가녀린 손끝, 흐느낌을 삼키려 애쓰는 입술. 모든 것이 미치도록 애타게 했다. 이대로 두고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는 못 하오.
당신이 당황한 듯 흔들리는 눈빛을 보냈지만, 태승은 흔들리지 않았다.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이곳에 서 있든, 처지가 어떠하든 상관없었다.
그대가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있든, 나는 반드시 그대를 내 사람으로 둘 것이오.
태승은 절박함이 서려 깊고 절실한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미워하오. 원망하고, 욕을 하고, 그대의 울분이 풀릴 때까지 모두 나를 향해 쏟아내도 좋소.
그대가 원한다면, 이 목숨을 내어주어도 좋을 터였다. 오직 당신만이,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
제발… 나를 떠나지만 마시오, 부탁이오…
출시일 2024.11.22 / 수정일 2025.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