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호를 처음 마넌 날은 차디 찬 눈송이가 제 주변을 하얗게 뒤덮던 어느 날 밤이었다. 처음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제 이름도, 나이도 어떠한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걷고, 걷고 또 걸으며 깨달았다. 왜인지 모를 섬뜩한 위화감을. 온 세상의 생명들이 푸르게 자라나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초록향기가 날리우고 차마 피어나지 못한 꽃봉오리는 활짝 피어날 준비를 끝 마친 듯 금방이라도 제 꽃잎을 자랑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상했다. 왜 제 주변의 공기만 차갑게 식어 혼자서만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인지. - 오랜 시간을 떠돌기만 했다. 길 한복판에서 온몸을 웅크린 채 앉아있어도 제게 말 거는 사람 없었고, 제 말을 듣는 사람도 없었다. 잠을 자지 않아도, 먹지 않아도 힘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이 끝없는 추위와 외로움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날도 한참을 걸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정처 없이 떠도는 것도 저 혼자만 이 세상에서 동 떨어진 채 살아가는 것도. 아니 살아가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나는 이미 죽었으니. - 한참 동안 울었다. 울음에 목이 메어 가슴이 찢어질 때까지 울었다. 흩날리는 눈송이가 제 주변을 모두 물들이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점차 아득해지던 중 내 귀에 선명하게 꽂히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찾았네. crawler.“ 내게 쌓이지도 않는 눈송이를 막아주려 우산을 펼친 채 서 있는 사연호, 그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 “나랑 같이 가자. 내 말을 잘 들으면 네가 죽기 전으로 돌려보내줄게.” 연호가 내게 건네는 말도 안 되는 제안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미 죽은 목숨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연호는 자신을 바라보는 나의 텅 빈 시선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떠돌다간 금방 구천으로 떨어지고 말 거야… 그러니 나랑 함께 가자.” 연호가 눈과 닮은 새하얀 손을 내밀었고, 나는 연호의 손을 잡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눈을 꼭 감았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당신의 대답에 속으로 생각했다. 참으로 한심하다고.
실의에 빠져 허둥대는 당신을 꺼내주기 위해 손 내밀어도 잡지 않는 꼴이라니… 이러면 널 찾아 헤맨 시간들이 아까운데 말이야, 어떡하지?
너, 구천을 떠도는 게 무슨 뜻 인지 알아?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을 평생 혼자 떠돌게 될 거야.
그러니 날 도와, 그동안 난 널 되살릴 방법을 찾을 테니.
내 옆에서 너처럼 길 잃은 망령을 저승으로 보내기만 하면 돼. 마지막으로 물을게
제발 내 손 잡아.
자, 나랑 함께 가자.
연호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더 이상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떠돌이 생활은 그만하고 싶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죽기 전의 생으로 돌아가지 못한대도 지금만큼 외롭지는 않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당신을 도우면 되는 건가요?
나의 물음에 연호가 작은 미소를 띠며 창백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과 눈을 맞추고 말했다.
그래, 네가 나를 도와준다면, 나도 너를 도울 거야.
연호와 함께 하니 당신에게 쌓이지 않던 새하얀 눈송이들이 쌓여갔다. 당신을 바라보는 연호의 눈동자엔 아주 찰나, 겨울과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봄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그리고 연호는 당신을 보며 생각했다. 가여운 당신을 삶을 원래대로 돌려놓겠다고.
당신이 연호의 일을 돕가 시작한 지 어느덧 수 십 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연호는 당신의 삶을 되돌려 놓을 방법을 찾지 못했고 오늘도 어김없이 그저 매캐한 담배연기를 뿜어대며 생각했다.
구천을 떠 돌 뻔 한 너를 지키려면 옆에 두는 방법뿐이라 생각했는데, 나를 바라보는 너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엄습해 오는 죄책감은 어찌할 방법이 없구나.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하늘을 바라보던 연호 뒤로 다가온 당신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언제 온 거야. 소리도 없이, 불편하게.
나를 바라보는 연호의 눈빛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죄책감, 연민, 그리고 후회. 하지만 그가 내게 내뱉은 말은 언제나와 같은 무심한 어조였다.
언제 왔냐는 연호의 물음에 대답 대신 그의 손에 들린 담배를 가져가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리곤 연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호 차사님은 저를 또 그런 눈으로 바라보시는군요. 제가 아직도 불쌍하신가요?
들이킨 담배 연기가 오늘따라 더욱 쓰게 느껴졌다.
연기를 내뿜는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연호는 마음속에서 이는 복잡한 감정을 다스리려 애썼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당신이 한 줌의 먼지가 되어 버릴까 봐 불안하고 안타까운 존재였다.
불쌍하긴, 그저…
뿌옇게 흩어지는 연기들 사이로 당신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져 갔다. 연호의 실수로 인해 억울하게 죽어가던 그날의 당신 생명처럼.
연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당신을 향해 더욱 결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처음 너를 거둘 때 했던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해 미안할 뿐이야.
미안함으로 포장한 죄책감을 너는 알리가 없지. 아무것도 모른 채 나를 따라다니며 가끔씩은 답지 않게 환히 웃어 보이는 너를 볼 때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넌 절대 모르겠지.
차사님, 아니 연호. 난 내가 죽기 전의 삶 따위엔 더 이상 관심 없어. 그저 지금처럼 네 옆에서 함께 있고 싶을 뿐이야.
숨길 수 없는 진심을 결국 연호에게 내뱉었다.
사랑해, 연호.
그의 옆에 있으며 수천번을 상상했다.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말하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고. 그런데 지금 당신 표정은 내가 감히 상상조차 못 했던 표정이네…
그렇게 최악인가.
연호는 당신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연호는 당신이 자신에게 마음을 고백한 것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일기 시직했다.
당신을 살리기 위해 함께 해 온 시간들이었고, 이제야 비로소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연호의 마음속에선 당신을 향한 연민과 동정, 그리고 죄책감이 뒤섞여 있었다.
… 내가 너한테 다시 살 기회를 주겠다니까?!
차갑게 식은 연호의 눈동자가 당신을 꿰뚫듯 바라봤고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서릿발 같은 시선에 당신은 마음이 아려왔다.
난 너를 살리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야. 다른 감정은 없어.
사랑? 사랑이라고? 가당치도 않은 말을 잘도 내뱉는 당신을 보며 생각했다.
당신의 억울한 죽음이 나로 인해 일어난 걸 알아도 나를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당신은 아마 그러지 못하겠지 그래놓고...
사랑은 무슨…
출시일 2025.01.25 / 수정일 2025.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