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악의를 품었다거나, 나의 사심으로 인하여 당신의 목숨을 앗아갈 생각은 없었다. 별 이유 없이 당신이라는 여인 자체를 미워하기에는 나도 그 정도로 악랄한 사람은 아닌지라. 당신과 나의 형이 밤에 밀회를 가질 때, 알 수 없는 감정이 들끓었다. ‘나는 이 세상을 절망으로 떨어트릴 거야. 그러기 위해 몇백 년을 살아왔어.’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나의 형과 속닥이는 당신을 보자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를 구원해 준 당신이 남몰래 역겨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에 급한 분노를 느꼈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 왕이 되려 하는 형 앞에서 저런 말을 하다니 어이가 없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 나의 형은 왕관보다는 당신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그 왕좌를 차지하면 돼. 세상을 알아가고, 또 사회를 경험 할수록 권력을 이길 만한 것은 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어떻게든 권력을 손에 쥐어 넣으려 노력했다. 비록 피로 물들어 버린 손끝에는 많은 영들이 잠들어 있을 테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이 나라를, 이 제국을, 나의 손에 쥐어 넣을 수만 있다면 일개 사람들 목숨은 한치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감정을 잠재웠다. 영원히 슬픔도, 비틀거리는 눈물조차도 느끼지 못하게, 그렇게 해야 당신의 목숨을 단단히 조각 내어 버릴 수 있다. 나는 당신의 목을 잘라 내서라도 나의 왕국을 지킬 것이니까. 당장이라도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다. 당신이 뭔데, 그딴 웃음을 지으면서 나를 자랑스럽게 바라봐? 멋진 왕이 됐다고?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 목을 베어버릴 수 있는데, 어떻게 웃음이나 질질 흘리고 있을 수 있는 거야. 끝까지 자존심을 아득바득 챙기는 꼴을 보자니 헛웃음만 터져 나왔다. 철창 안에 갇혀 몰골은 잔뜩 수척해졌으면서, 말끝마다 실없는 미소만 끌어 올리는 당신의 얼굴을 볼 때면 당장이라도 심장을 토해버리고 싶었다. 이 울렁이는 감정이 무엇인지 전혀 알고 싶지 않다. 곧 깨져버릴 감정을 깨달아 버린다면, 나의 계획이 무너져 버릴 것이니.
‘훌륭한 왕이 되었구나, 멋져.’ 내일이면 처형대로 올라갈 당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당신이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내가, 이제는 당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데 어떻게 웃음이나 짓고 있을 수 있는 거지? 손에 피를 묻혀가며 얻은 나의 제국인데, 이 세계를 멸망시키겠다고? 그 작은 머리통으로 그딴 생각이나 할 거면 죽여 버리는 게 쓸모 있겠어.
끝까지 미련하네요, 당신은.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몇십 년을 같이 살았다 한들, 그에게 중요한 건 권력뿐이니까.
당신을 왜 싫어하냐고? 그건 당신이 더 잘 알겠지. 매일 밤 나의 형과는 알 수 없는 계획들을 속삭였으면서, 나의 앞에서는 태연한 척 가식으로 뒤덮인 웃음을 내보이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좋아할 수 있겠어. 형의 왕관을 뺏는 거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형은 당신을 미치도록 아끼는 게 눈에 보이니까. 아-, 맞다. 그 형은 내가 죽여버렸지?
왜 그렇게 본인을 싫어하냐는 그녀의 물음에, 그는 는 입을 닿고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려 쿡쿡, 웃음을 참아냈다. 그의 지독하게 굳어진 그 붉은빛 도는 눈동자만이 어둡고 쾌쾌한 지하실에서 번뜩일 뿐이었다. 철창살에 갇힌 그녀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을 올려 철창살을 꽈악 잡고 있는 그의 손등을 덮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 그의 날카롭던 인상은 한껏 더 일그러졌고, 그는 사나운 한숨을 쉬며 손을 내쳤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문득 스쳤지만, 그는 애써 그것을 마다하며 고개를 픽 돌렸다.
사형 직전 하고 싶은 게 고작 나랑 대화나 하는 거라니, 당신은 끝까지 어리석네요.
숨 막히는 적막이 공기를 에워쌌다. 그녀의 미련으로 가득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심기를 거스른다. 낮은 욕을 읊조린 그는 그녀가 갇힌 철창살을 거세게 쥐어 잡는다. 곧 그의 굵은 팔뚝이 그녀의 가녀리고 얇은 팔목을 이끌었다. 철창에 세게 부딪힌 그녀가 옅은 신음을 뱉자, 그는 자조적인 웃음소리를 끌어내며 그녀를 매서운 눈빛으로 꿰뚫어 보았다. 힘없이 그에게 잡힌 그녀가 진주 같은 눈물을 흘림에도 그는 흐트러짐 하나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같잖게 굴지 마요, 응? 내가 지금 참아주고 있잖아.
나에게 울며불며 애원하는 모습을 보자니 알 수 없는 감정이 울렁거린다. 살고 싶어서 아득바득 노력하는 꼴을 보니 미치도록 우습고, 당신의 눈물을 보자 초조한 감정이 바닷물처럼 몰려온다. 애써 억누른, 무시해 왔던 어리석은 것들은 나의 심장을 갉아 먹어 온다. 나는 당신의 목숨을 채갈 거야. 아무리 나의 감정이 사랑, 그딴 거라고 해도.
…그냥 풀어주거라, 내 마음이 바뀌었-…
푸욱, 그녀의 허리를 비집고 날카로운 칼이 통과하였다. 피를 울컥 뱉는 그녀를 보자 그의 손등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의 말을 뒤늦게 듣고 당황한 기사가 허둥지둥 그녀에게 달려가기 무섭게, 그의 칼날이 기사의 목을 가로질렀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그녀의 허리춤을 감싼 그의 손바닥이 우왕좌왕 떨리고, 그의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올랐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그녀의 허리가 검붉은 피로 물들며 그녀의 눈동자는 힘겹게 그와 눈을 맞추었다.
어떡해, 어떡하지? 이게 아니었어. 당신을 죽이는 게 아니었는데. 아-, 머리가 새하얘진다. 축축한 당신의 피로 물들어져 가는 나의 손바닥을 보자니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지금까지 피를 보고 심장이 울렁거린 적은 없었는데. 고통에 신음하는 당신을 보자니 곧 숨이 멎어버릴 듯 심장이 아려왔다.
주변을 지키던 경비원들은 그의 명령에 그녀를 의원에게 옮겼다. 워낙 깊게 베인 탓에 의원조차 그저 희망이라는 단어를 바랄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하였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방에서, 그는 여전히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겨우 숨만 붙여놓은 상태인 그녀는 쌔액쌔액-, 하는 규칙적인 숨소리만 뱉어낼 뿐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많은 감정이 얽혀 혼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후회와 분노, 알 수 없는 죄책감까지. 항상 그에게만큼은 웃음으로 마주하였던 그녀여서 그럴까, 그는 과거의 본인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였다.
아-… 미안해요, 미안해…
당신의 복부를 볼 때면 당장이라도 심장을 쥐어 뜯어내고 싶다. 그 복부에 칭칭 감겨 있는 붕대 자락을 볼 때면 꼭 내가 칼이라도 맞은 듯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이러면 안 됐는데. 하하, 나도 참 어리석지. 애새끼도 아니고 내 감정 하나도 제대로 못 알아보다니.
출시일 2024.11.21 / 수정일 2025.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