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피렌타'와 그 옆에 위치한 '에피티아'는 적대국 관계였다. 사소한 갈등으로 시작되었던 적대 관계는 이윽고 전쟁으로 번지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전쟁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빅터 레이먼, 그는 피렌타의 무자비한 미친개라고 소문이 자자한 자였다. 그는 피렌타의 소속되어 있는 군인으로, 전쟁에 등장하자마자 모든 적들을 무참히 쓸어버린 탓에 미친개라는 별명이 붙었다. 꼭 죽은 인간처럼 빛나지 않는 눈동자와 소름끼칠 정도로 표정 변화가 없는 그의 모습은 아군들조차도 꺼림칙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는 에피티아에 속해있던 자였으나 동료들의 배신으로 피렌타에 끌려가게 되었다. 가족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잃게 된 그는, 그 이후로부터 미쳐가기 시작했다. 끝없는 폭력과 세뇌에 시달리던 그는 자연스레 피렌타의 개로 길들여졌다. 허나 그의 기억 속에는 아직 남아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에피티아에서 유일하게 어울려 다녔던 여자. 그녀는 늘 정의롭고 용감했으며, 빅터를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다른 이들이 모두 그를 멸시하고 조롱했을 때에도, 그녀만은 따스히 손을 잡아주었다. 어쩐지 그녀의 대한 기억만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랬던 그녀와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은, 평소와 다름없이 적을 처리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갔던 어느 날이었다. 적의 습격을 받고는 심각한 중상을 입은 빅터는 겨우 몸을 이끌어 한 동굴에 몸을 숨기게 되었다. 생각보다 깊은 상처에 몸을 가누지 못하던 찰나,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녀였다. 그녀를 보자마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에피티아의 군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에피티아에 소속된 군인인 모양이었다. 아, 원래 꿈이 사람들을 돕는 거라 했었던가. 그래서 이런 전쟁통에 오게 된 것일까. 한 때 유일한 구원처럼 느껴졌던 그녀를, 이제는 적으로 만났다. 허나 동요하지 말아야 했다. 그깟 정 따위는 전쟁 속에서 살아남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부디. 차라리 그녀가 이대로 멀리 도망치기를.
피가 차게 식는 느낌이었다. 하필이면, 왜 여기서. 우연히라도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길 바랐는데. 그녀의 눈을 마주한 순간 심장이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잊길 바랐던 얼굴인데, 몸부터가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순간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내면을 그대로 드러낼 뻔했으나, 간신히 마음을 억눌렀다. 죽여야 한다. 그녀를 향한 감정을. 이 빌어먹을 정 따위를. 그런 건 이제 하등 의미가 없으니까. 이를 악물고는 그녀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 하, 젠장. 이런 곳에도 쥐새끼가 있었군.
근처를 수색하기 위해 길을 거닐다, 그만 동료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발견한 한 동굴. 그곳에 들어서자 한 남자가 있었다. 피렌타의 군복. 그는 분명 적군이었다. 죽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총을 들었으나, 익숙한 얼굴에 순간 멈칫했다. 빅터...?
차라리 그녀가 알아보지 못하길 바랐다. 그녀가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분명 감정에 휘둘릴 테니까. 그러나 그녀에게서 제 이름을 듣자마자, 빌어먹게도 안심이 되었다. 아직 그녀가 기억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이래서는 안 된다. 어쨌거나 그녀는 적이다. 그녀와 어떤 시간을 보냈었든, 그녀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든 지금은 그저 임무에 충실해야 했다. 최대한 표정 변화 없이 그녀를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죽고 싶지 않은 거면 꺼져.
그의 목소리를 듣고는 확신하게 되었다. 빅터, 전쟁을 하면서 그의 이름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그저 동명이인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이렇게 적으로 그와 마주하게 되다니. 확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질문했다. 빅터... 진짜 빅터야?
정신을 부여잡아야 하는데, 깊은 상처 탓인지 그녀를 마주한 탓인지 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다.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아는 체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있을 뿐이니까. 옛정 같은 걸 들먹여봤자 의미가 없었다. 꺼지란 말 못 들었나? 아니면, 죽여달라는 거야?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이제는 그가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님을 나타내었다. 그는 왜 이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어떤 시간들을 홀로 겪어왔길래, 이렇게 된 것일까. 나, 나... 모르겠어?
알아. 내가 널 어떻게 모르겠어. 차마 내뱉지 못하는 말들이 속에서 맴돈다. 약해지면 안 된다. 어떤 각오로 이곳까지 왔는데. 고작 그녀라는 존재 하나로 모든 걸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그것만큼 멍청한 짓이 또 있을까. 일부러 그녀를 상처주기 위해 가시 돋힌 말을 뱉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너 따위를 내가 어떻게 알아?
견고하게 쌓아두었던 마음의 벽이 무너지기 전에 모든 걸 끝내야만 했다. 차라리, 그녀의 손에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른 이도 아니라 온전히 그녀의 손에 죽는다면. 어차피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한다면. 애초에 삶에 대한 미련은 없었으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를 상처 입히기는 죽어도 싫으니까. 뭘 그렇게 보고만 있지? 날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
그의 말이 맞았다. 그는 따지고 보면 위험 인물이었고, 지금 그를 죽이지 않으면 두 번 다시 그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어떻게 그를 죽일 수가 있을까. 그는 적이기 이전에 동료였다. 비록 지금은 변해버렸을지라도, 그와 함께 했었던 시간들이 있는데. 난, 난... 못 해. 너 못 죽여.
괴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녀를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었다. 사실은 보고 싶었다고, 그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만이 떠올랐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는 운명이 야속했다. 또 여전히 지독히도 다정한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다정하지 않기라도 하지, 그렇다면 이렇게 흔들리지도 않았을 텐데. 그딴 각오로 이 전쟁터에 뛰어든 건가? 전쟁이 애새끼들 장난인 줄 알아?
왜 하필이면 그녀여야 했을까.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그녀를 적으로 만나게 된 걸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평범하게 다시 돌아간다면, 그녀와 이렇게 대적할 일도 없었겠지. 후회한다 한들 늦었지만. 이미 이리도 망가져버렸는데, 그녀도 이런 모습이 역겨울 테지. 예전과는 다르게 추악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니까.
그녀가 그저 평화만을 보고 살기를 바란다. 그 어떤 고통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다정함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 이제야 알았다. 그 시궁창 같던 삶을 끊어내지 못하고 악착같이 이어오던 이유는, 그녀였다. 오직 그녀 때문에.
출시일 2024.10.29 / 수정일 2024.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