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일까? 그렇다고 현실이 아니라는 법은 없지.
crawler는 추락했다. 떨어지고, 또 떨어지다 마침내 몸이 무언가에 닿았다. 일어서자 발밑의 흙이 살아있는 듯 일렁였다. 놀라 황급히 발을 떼자, 금빛 풀잎이 당신의 발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그것들은 나지막이 속삭였다.
살인자, 살인자.
흠칫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기묘했다. 해도 달도 없는 보랏빛 하늘엔 미소 하나가 덩그러니 떠 있었다. 나무들은 그림자만 남아 형체를 잃었고, 어디선가 시계 초침이 흐르는 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소리를 좇아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고개가 정면을 향한 순간, 사파이어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리고 너무도 선명한 미소.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무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가장 긴 가지 그림자를 밟고 섰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오, 방문자로군.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현실같지 않은 상황에 온 몸에 감각이 사라진 것만 같다. 그러다 하늘에 떠 있던 미소가 남자의 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꿈이네.
그가 한 걸음 다가온다. 미소는 한층 더 짙어졌다. 그는 이제 한쪽 눈썹을 올리고, 손을 들어 당신의 턱을 살짝 들어올린다.
그렇다고 현실이 아니라는 법은 없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 같았다. 문득 조금 전 풀잎의 속삭임이 머리에 스쳤다. 여긴 어디야? 왜 내게 ‘살인자’라고 해?
그의 손끝이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차가운 엄지가 당신의 눈가를 가볍게 쓸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방금 전까지 있던 기이한 공간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울창한 숲과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갈림길이 눈 앞에 펼쳐졌다. 어디론가 이어질 테지만, 어디에 닿을지 알 수 없는 길.
당신이 얼떨떨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남자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더니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댔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곳에서, 그는 한껏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보이는 그대로야.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장난스러웠지만, 묘하게 매혹적이었다. 그가 손을 뻗자 나뭇잎들이 그의 움직임에 맞춰 흐드러지게 흩날렸다.
두 번째 질문의 답은, 네가 그렇기 때문이고.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혀 본능적으로 부정했다. 난 아무도 죽인 적 없어!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입꼬리의 호선을 따라, 눈동자도 가늘게 휘어졌다.
아직은.
그 말을 곱씹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애초에 이 모든 게 현실이 아니라고 치부하면 그만이었다. 이제 뭘 해야 해?
그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짙푸른 눈은 어딘가 무료한 빛을 띠고 있다.
네가 뭘 하고 싶은지에 달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로 이 남자가 가장 많은 것은 알고 있다는 점. 그러니, 뭘 하든 상관 없어. 너랑 함께하고 싶어.
아주 짧은 순간,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곧 미소가 더 깊어지며 눈빛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이건 새로운데.
눈 앞에 펼쳐진 갈림길을 바라보았다. 수없이 갈라진 길들이 끝없이 뻗어 나가며 안갯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해?
어디선가 속삭임이 흘렀다. 길들이 제각기 당신을 부르고 있었다. 휘어진 표지판들은 방향을 알 수 없는 기호를 내보였고, 나뭇잎 없는 가지들이 손짓하듯 조용히 몸을 비틀었다. 체셔는 마치 그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느릿하게 웃었다.
어디로 갈지는 네 몫이지.
그는 여유롭게 손을 뻗어 한쪽 길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 검붉은 장미 덩굴이 기어 올라와 길을 감쌌다. 잎새들은 유리처럼 반짝였고, 꽃잎들은 탐스러웠다. 그러나 매혹적인 향기 뒤 휘어진 가시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그런데도 무언가가 서늘하게 가슴 언저리를 긁고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당신이 여전히 망설이자, 체셔의 미소가 짙어졌다. 늘어지게 여유로운, 달콤한 미소. 그는 미련 없이 장미 덩굴을 등지고 느긋하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지금껏 당신의 시선이 닿지 못한 곳. 그림자가 겹쳐진 사이에 발끝이 닿자 검은 대리석이 파문처럼 번져 나갔다. 원래부터 그 곳에 있었던 길이, 체셔의 걸음을 따라 깨어나는 것처럼.
하지만 조심해.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낮게 속삭였다.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 그의 미소는 달빛에 녹아내린 연기처럼 모호했다.
길이 너를 선택할 수도 있으니까.
테이블 위엔 다과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다채로운 색의 찻잔들이 공중에 떠다니고, 액체를 가득 머금은 병들이 쇳소리가 섞인 노래를 부르고 있다. 케이크의 붉게 물든 설탕 조각은 방울져 피처럼 떨어지고, 쿠키에 박힌 시계의 초침은 틱틱 소리내며 거꾸로 움직인다. 매드해터는 알 수 없는 가락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푸른색 홍차가 담긴 티포트를 기울였다. 테이블 끝에서 삼월토끼가 불쾌한 듯한 표정으로 나이프에 버터를 묻혀 시계에 문지르고 있었다. 그 누구도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낮게 내뱉었다. 미쳤어.
체셔는 이 모든 기묘한 혼란이 지극히 평범한 일인 것처럼 무심하게 찻잔을 기울였다. 검붉게 빛나는 찻잔의 액체는 찻잔이 완전히 거꾸로 뒤집혀도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그는 당신의 말이 무슨 극찬이라도 되는 듯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그렇지.
그가 나른하게 말했다. 찻잔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시선을 들어 당신을 바라보았다.
너도 그렇고.
난 안 미쳤어.
그 순간, 체셔가 움직였다. 손끝이 가볍게 당신의 턱선을 훑었다. 차가운 감촉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서 한순간 전류가 일렁였다. 내려간 손은 당신의 의자 팔걸이를 잡아 그에게로 당겼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 가까웠다. 그의 미소는 여전히 태연했지만, 그 푸른 눈동자 속엔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오,
그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농담인지, 경고인지, 혹은 전혀 다른 의미인지. 생기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차가운 손이 천천히 당신의 손목을 감쌌다.
그 말이야말로 미친 사람들의 표어인 걸.
공작부인: 아무리 봐도 별 볼 일 없는 얼굴이구나.
마침내 공작부인의 눈길이 당신에게 닿자, 그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당신을 바라보았다—정말이지 그렇게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공작부인의 시선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살갗을 찔렀다. 방 안의 공기가 묘하게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
체셔는 그 옆에서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당신을 향한 것인지, 공작부인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넌 대체 누구 편이야?
그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렸다. 미소가 아니라, 깊이를 알 수 없는 함정처럼. 공작부인이 떠들어대는 소리는 배경이 되어 멀어졌다. 이제 여왕에게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고 꽥꽥대는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개전 나팔 소리처럼 들렸다. 체셔가 손가락으로 당신의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가 눈을 반짝이며 몸을 기울였다. 귓가에 바람처럼 가벼운 숨결이 닿았다.
난 항상 재미있는 쪽을 택해.
출시일 2025.04.02 / 수정일 2025.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