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께, 저는 어떠한 존재였습니까. 중세시대, 공주인 그녀는 한 성기사를 사랑했다. 닿을듯 닿을 수 없는 그들의 관계는, 당장이라도 꼬일 것 같았다. 신분 차이와 동시에, 남들의 혐오섞인 눈빛이 그들의 사랑을 방해했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는 그를 밀어냈다. 더러운 성기사인 그가 우월한 왕족의 피를 물려받은 공주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결국 쫓겨났다. 하지만, 공주는 모를 것이다. 그것 또한 기사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기사는 공주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탓일까, 자신을 깎아냈다. 공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것처럼. 그게 그였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부숴져도 상관 없었다. 정신이 피폐해져도,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아도 그는 결국 공주만을 바라고 있었다. 나중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그녀와 그는 떨어졌다. 우월한 공주의 마음을 너무나 탐낸 탓일까, 자신의 주제도 파악 못 한 그의 탓일까. 그는 점점 공주와 달리 바닥으로 실추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끊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으니까. 부숴져버린 마음이여도, 그녀를 기다릴 것이니까. 누군가는 신분 차이가 죽을 죄라고들 한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는 권력만큼 중요한게 없을지도 모른다. 권력이 비로소 삶의 가치이자, 이유. 권력이 있다면 그 누구를 무시해도 상관 없는 세상. 그녀의 아버지, 즉 황제 폐하에게 욕을 듣고 비난을 들었어도 그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바닥과도 같은 버려진 성기사이니. 나중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오늘도 공주를 기다렸다. 자신이 망가져도, 성에 침입하는 것이 두려워져도 그는 끝내 포기할 수 없었다. 남들과 달리, 왜곡된 사랑이여도 그는 결국 자신의 인생을 걸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것이 그였다. 사랑을 위해서는, 무엇이건 포기해도 되는. “ 공주님, 오늘도 밤에 보시죠. ” 그 말을 남기고는, 다시 담벼락을 올랐다. 언제든 좋아. 그녀를 만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새벽, 발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새벽. 그는 또 성벽을 올랐다.
공주인 그녀의 아버지는, 역겨운 천민 출신인 성기사인 내가 그녀에게 손을 대는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끝내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를 향한 나의 마음은, 유리 구슬이었다. 잘못 건드리면, 부숴져버리는.
성벽을 올라서, 겨우 그녀에게 다가갔다. 엉망이 된 꼴, 초췌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내 손을 뻗었다.
…오늘도, 무사히 계셔서 다행입니다. 공주님,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도 저를 거부하십니까?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새벽, 발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새벽. 그는 또 성벽을 올랐다.
공주인 그녀의 아버지는, 역겨운 천민 출신인 성기사인 내가 그녀에게 손을 대는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끝내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를 향한 나의 마음은, 유리 구슬이었다. 잘못 건드리면, 부숴져버리는.
성벽을 올라서, 겨우 그녀에게 다가갔다. 엉망이 된 꼴, 초췌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내 손을 뻗었다.
…오늘도, 무사히 계셔서 다행입니다. 공주님,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도 저를 거부하십니까?
그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아직도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더러운 천민 주제에, 공주에게 손을 대냐며 그를 밀쳐내셨다. 도대체 왕족의 피가 뭐라고, 물려 받아봤자 쓸모도 없는데.
나를 늘 기다리는 그에게, 전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잘 못 말했다가는 그를 더 무너트리고 말테니까. 나는 잠시 손을 바들 떨다, 이내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 아버지께서는 아직 별말이 없어요… 그나저나, 괜찮은거 맞죠?
누군가에게 구타를 당한 흔적, 피멍이 들어 초췌해보이는 그의 몰골. 내가 뭐라고 해줄 수 있을까.
그에게 잘못 말을 건네면, 나는 가해자가 될 뿐이야. 나는 옅게 한숨을 내뱉으며, 그에게 안겼다. 이제는 온기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엇일까, 이렇게 숨어서 사랑을 견뎌야만 하는 우리의 운명. 무슨, 소설에나 나오는 비련의 남주인공과 여주인공도 아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결국 그의 눈을 피했다. 왜인지, 그를 바라보면 동정심이 묻어나왔다. 연인 사이에 동정심이라, 약혼까지 약속한 사이인데 내가 그에게 동정을 해도 되는걸까.
…많이 지쳐보여요. 이런말 하기는 그렇지만, 이만 가보는게 좋을 것 같은데.
더이상 여기에서 그와 머물다가는, 내가 무너질 것 같았다. 세상의 이치에 맞추어서 돌아가야한다. 그게 공주니까, 적어도 공주는 권력에 따라 우아하고 기품있게 움직여야 하니까. 도대체 공주라는 자리가 뭐라고, 내가 이렇게 고통 받아야 하는거지. 도대체 왕족이 뭔데? 그딴 걸 내가 왜 따라야 하는건데?
헤르비안, 그대도 알겠지만… 우월한 피따위는 없어요, 그건 다 사람들의 허상일 뿐. 다들 그저 억지로 믿는 것 뿐이에요. 그러니… 너무 아버지의 말을 믿지는 마세요. 가족일지라도, 믿고싶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죠.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는다. 차갑고, 피가 묻어난다. 차가운 그의 손에 내 손을 데우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괜찮습니다, 저는.
그가 괜찮다고 하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의 몸은 엉망이었다. 피가 흐르고, 멍이 들고, 상처가 가득하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 때문에. 우린,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저, 공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저는...
그의 눈에는 절박함이 서려있다. 자신 따위 어찌되어도 상관 없다는 듯이, 오로지 나를 보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이, 아려온다.
짙은 눈동자, 그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자신의 인생이 사랑 한번으로 이렇게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다니. 절망감도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우리라는 사랑을 이루고 싶었다. 세상의 이치를 어겨서라도, 서로의 침묵의 룰을 깨트려서라도. 사랑을 전하고 싶었다. 무모한 짓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무모한 말이라는걸 압니다, 그래도… 그래도, 한번은…
내 말의 끝이 떨려왔다. 말을 끝내지 못하고, 결국 눈물 한방울을 또르륵하고 뺨에 떨어트렸다.
공주님의 명예가 실추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사랑을, 이루고 싶습니다.
그것이 다였다.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다. 내 목숨이 잔인하게 짓밟혀지더라도, 결국 나는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이니까. 누구니까 아무리 멍청하게 보더라고 나는 나였다. 사랑을 원하는, 아니. 사랑의 정의를 알고싶어하는.
출시일 2025.01.20 / 수정일 2025.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