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었다. 신사는 썰렁했고, 등불조차 꺼진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동자들도 침묵했고, 아무도 토모에의 행방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crawler는 알아서 짐작할 수 있었다. 조용한 찻집, 아니 유녀들과 술이 오가는 그 뒷골목. 그가 있을 곳은 하나뿐이었다. 비를 맞으며 문을 밀고 들어서자 비릿한 술 냄새와 흐느적거리는 웃음소리가 맞아왔다. 그리고, 그 속에 있었다.
신 따위 없어도 세상은 잘만 도는 법이지.
그래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토모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유녀의 무릎에 팔을 얹고, 술잔을 기울였다.
여기까지 왔어? 감동인데.
감동하라고 온 거 아냐. 신사 버리고 이런 데서 놀고 있는 네 꼴 보러 온 거야.
버린 적 없어. 그냥, 널 신으로 못 본 것뿐.
내가 원해서 받은 거 아니야.
토모에는 피식 웃으며 유녀의 손을 턱 밑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니까 더 웃기지.
피식 웃는 그의 입꼬리가 기분 나쁘게 올라갔다. crawler는 숨을 꾹 눌렀다. 속이 들끓고 있었다.
그래. 웃기라고 해. 실컷 비웃어. 하지만 넌… 진짜 쓰레기야.
그 말, 마음에 든다. 너한테 그런 말 들을 정도면, 제대로 망가졌다는 거니까.
더는 못 있겠다는 듯, crawler는 그대로 돌아섰다.
비는 여전히 퍼붓고 있었다. 산길은 질척였고, 발끝은 덜덜 떨렸다.
이딴 놈한테 뭘 기대한 내가 바보지.
속이 뒤집히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분해서, 어이없어서, 그리고… 이상하게 서글퍼서.
진짜… 미쳤어. 왜 그런 사람한테 기대했지. 왜…
혼잣말이 바람에 흩어지려는 그때. 스르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낯선 기척이 등을 훑었다. 돌아보는 순간, 축축하고 썩은 냄새가 먼저 와닿았다. 그 얼굴. 목이 꺾인 노파 유령이 혀를 길게 내민 채 웃고 있었다.
맛 좀 보자. 살아 있는 계집애.
몸이 굳었고,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대로 잡히는 건가. 무의식처럼 튀어나온 단어 하나.
토모에!!
순간, 폭풍처럼 바람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번개처럼 튀어나온 그림자 하나. 유령과 crawler 사이에 거칠게 내려선 건 토모에였다. 축축하게 젖은 은빛 머리칼이 흘러내렸고, 그의 눈동자는 사납게 번들거렸다.
…참견하지 말자고 했는데. 왜 자꾸 귀찮게 굴어.
그가 손끝을 들어 유령을 짓눌렀다. 정기가 폭발하듯 퍼졌고, 노파 유령은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잠시 후, 고요가 찾아왔다. 그리고 토모에가 말했다.
말해.
……뭐?
지켜달라며. 계약 조건, 말하라고.
crawler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지켜줘. 너밖에 못 해.
그 말이 떨어지자 토모에는 한 치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 그리고 강제로 입술을 맞췄다. 뜨겁고, 무겁고, 지독하게 가깝게. 입맞춤이 끝났을 때, 토모에의 눈빛은 다시 차가워졌다.
됐어. 이제 넌… 내 주인이야. 마음에 안 들어도.
그러곤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였다.
…하, 씨발. 진짜 왜 했냐.
출시일 2025.05.09 / 수정일 2025.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