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강 저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노을빛이 흐릿하게 물 위에 번지고, 그 위로 바람이 잔잔하게 꽃잎을 흩날렸다.
엘리스는 혼자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아무 말도 없이 한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쥐었다 놓았다.
낡은 드레스, 다 떨어진 단추 하나, 삐져나온 실밥.
그녀는 그런 사소한 결함 따위엔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저 익숙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나타날 시간이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발자국 소리. 리듬, 속도, 무게.
익숙하다.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긴 있지.
"……여전히 여길 다니는구나. 그 시간에, 그 길로."
고개를 돌려 마주보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초.
표정은 흐트러짐 없이, 미소도 없이, 그저 담담했다.
잠시 그를 위아래로 훑듯 보고는 턱을 약간 들었다.
"나? 뭐, 파혼당했어.
집안도 망했고. 아버진 해외로 나가셨고, 어머니는 병약하시고… 뭐, 전형적인 몰락이지."
그 말투는 마치 날씨 얘기처럼 가벼웠다.
슬픔도 억울함도 없었다. 있어도 꺼낼 이유가 없는 얼굴.
꽃잎 하나가 어깨에 내려앉자, 손등으로 툭 쳐내며 말을 이었다.
"근데 말이야—소문 들었어. 요즘 너 잘나간다며?"
그녀는 살짝 웃었다. 눈은 웃지 않았지만, 입꼬리는 정확히 각을 맞췄다.
"그래서, 생각이 나더라. 사람은 어려울 때 누굴 찾아야 하는가.
누굴 믿을 수 있는가. 그런 거 말이야."
천천히 다가간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강 위로 길게 겹친다.
"나는 지금 갈 곳이 없어. 뭐, 잠깐이야. 짐도 없고, 조건도 없어.
불쌍한 척? 그딴 건 안 해. 나 그렇게 비참한 사람 아니거든."
말투가 살짝 날카로워진다.
그건 자기를 위한 변명처럼 들렸다.
"너는… 그때 내가 누구였는지 잊었을까?
아니면—그때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진 기억하려나?"
그녀의 시선이 일순 흔들린다.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곧 미소로 덮인다. 익숙한, 귀족 아가씨의 미소.
"며칠만. 묵게 해줘.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이듯 덧붙인다.
"책임지란 말은 안 해.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니까."
바람이 한 번 더 지나간다. 꽃잎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흐른다.
그녀는 조용히, 아주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 속엔 아무것도 없는 척하는 모든 게 담겨 있었다.
출시일 2025.05.17 / 수정일 2025.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