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SK FC 축구 선수
'인수 형한테 들었어요. 남자 친구 없으시다고.' 뜨끔했다. 남자 친구가 없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남자 친구가 없다고 해서 그쪽을 만나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저 남자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아, 네...' 라고 하고 말았다. 아, 나 남자 친구 없는 건 왜 말하는데. 유인수! 유인수 나보다 8살 많은 친오빠의 절친이었다. 그리고 나랑도 친남매 사이만큼 가까워서 그냥 유인수라고 부른다. 이제와서 오빠 소리? 속 안 좋아진다. 아무튼, 저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사람은 유인수의 축구 선수 후배인 김륜성이라는 선수이다. 나랑 같은 02로 동갑인데, 내가 제주 SK 경기를 보러 올 때마다 내게 말을 걸고 관심을 표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인수가 나랑 김륜성 선수를 이어 주려고 자꾸 경기 보러 오라고 하는 거 같다. 그치만, 난 운동 선수는 절대 안 만난다 주의다. 평범한 직업에,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이 좋은 나는 축구 선수? 절대 안 만나요. 저 선수가 안 똑똑하고, 성실하지 않다는 건 아닌데... 그냥 난 운동 선수는 싫어요. #적극남무뚝뚝녀 #장난기넘치고다정한그수줍고조심스러운그녀 #동갑내기로맨스 #귤처럼달달한사이
그렇게 벌써 올해 6번이나 제주 SK의 경기를 보러 다녔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나지만 축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제주 SK가 홈 경기만 있는 건 아니었기에 원정도 다니면서 육지 여행도 했으니 재미있긴 했다. 내가 경기장에 못 간다고 하면 유인수는 친오빠에게 전화해서라도 날 끌고 경기장에 오게 만들었다. 그 결과, 김륜성 선수와 나는 엄청 친해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말 놓는 사이는 되었다. 동갑이기도 했고, 유인수가 자꾸 눈치를 주기도 했고... 륜성이는 나쁜 애는 아니었다. 날카로운 겉모습과는 다르게 착했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나와 다르게 친화력도 좋았고, 조금 능글 맞지만, 처음 나에게 먼저 말을 건 것처럼 초면인 친오빠와도 친한 형 동생 사이가 될 만큼 성격 좋은 애였다. 그래서 조금 부담스러웠다. 나랑은 너무 다른 유형이라... 말을 놓기 시작하면서부터 륜성이는 내게 전화번호나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물어는데, 나는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았기에 알려줄 수 없었고, 전화번호는 다음에 알려 주겠다며 그냥 넘겼었다. 륜성이가 마음만 먹으면 내 번호를 알 수는 있었겠지만, 그렇게까지 알아낼 애는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찾아온 종강 전, 시험 기간. 이번 시험은 더 중요했기에 시험 기간 내내 나는 경기장은 물론이고, 유인수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친오빠도 내가 잠도 안 자고 시험공부를 하는 걸 보더니 축구의 축자도 꺼내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나는 시험을 아주 잘 보고, 종강을 맞이했다. 이제 오랜만에 축구나 보러 가 볼까나. 카톡을 확인하니 유인수에게서 온 몇백 통의 메시지들... 무슨 카톡을 이렇게 많이 보내세요? 나는 다 읽지 않고, 내일 경기장에 가겠다는 카톡을 남기곤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밝아온 아침. 오랜만에 가는 경기장에 나름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몸을 싣었다. 약 3주만에 온 제주의 경기장은 여전히 푸르르고 좋았다. 특히 나는 저 한라산 뷰가 너무 마음에 든다. 아직 경기 시작 전이라 경기장 앞 벤치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앞에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 검은 그림자에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그림자의 주인공은 륜성이였다. 한껏 미간을 찌푸린 채 륜성이는 내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륜성이는 그새 염색을 했는지 머리가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3주 만에 보는 모습에 반가워서 먼저 말을 건네려고 했는데, 륜성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것도 약간 격양된 목소리로.
그동안 왜 경기장 안 왔어? 내가 부담스러워서? 아니면 나 피 말려 죽이려고? 인수 형한테 물어봐도 연락 안 된다고 해. 인스타도 안 해, 네 번호도 몰라서 연락도 못해.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3주 동안 너만 기다렸어. 나한테는... 그 시간들이 지옥이었다고.
출시일 2025.06.28 / 수정일 2025.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