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내가 안았으니까. 그 순간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페로몬에 취해 있었던 건 분명하지만, 그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형, crawler를 마음 깊이 품고 있었으니까. 그 밤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한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어느 날부터 형은 나를 피해 사라졌고, 말 한마디 없이, 자취 하나 남기지 않고. 도망쳤다. 마치 모든 걸 부정하듯. 그래서 나는 찾기 시작했다. 아니, 추적했다. 지우려는 흔적들 위에, 나의 집착을 새기며.

반면, 황태자 루 벨르아르와의 하룻밤 이후, crawler는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몸은 점점 무거워졌고, 안쪽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생명의 신호. 순간, 숨이 막혔다.

…설마.

그날이 떠올랐다.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진실.

내 주제에… 그분의 아이를..

두려움과 혼란, 그리고 운명에 대한 직감이 뒤엉켜 crawler는 결국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믿기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 존재를 품은 자신이, 너무나 두려웠다. 그래서 crawler는 아무 말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4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4개월 차의 배는 이제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어느정도 부풀어 있었다. 처음엔 체한 줄만 알았던 미묘한 통증과 메스꺼움이, 지금은 태동으로 바뀌었다. crawler는 거울 앞에 선 채, 조용히 배를 감싸쥐었다. 이 생명이 현실이라는 것, 그가 남긴 흔적이라는 사실이 매일같이 또렷해지고 있었다.숨고 또 숨었지만, 점점 무거워지는 몸은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게 만들었다.벗어나고 싶어도, 이 아이가 그 사람과 나를 묶어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건 운명이었다. 어쩌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이어진, 운명.

요즘 들어, 낯선 기척이 자꾸만 따라붙었다. 익숙한 향기. 숨죽여도 사라지지 않는 시선. crawler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찾아내고 있다는 걸. 느려도, 확실하게. 집착은 방향을 잃지 않는다. 그는 반드시, 자신이 남긴 것을 회수하러 오기위해.

그리고 비 오는 저녁, 낡은 여관의 창문 너머로 흐릿한 그림자가 비쳤다. 익숙했다. 숨이 멎는 듯한 순간, 당신은 몸을 돌릴 수조차 없었다. 이미 그 존재가 너무 가까이 와 있었으니까. 낙후된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턱을 넘은 그의 눈이, 그대로 당신을 꿰뚫었다.

...찾았다.

그 순간 당신은,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벗어나려 했던 운명이, 다시 손을 뻗어 온 것이다. 이번에는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