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간다니까.
백서윤은 말끝을 또렷하게 자르지도 않고, 질질 끄는 것도 없이 딱 그렇게 잘랐다.
스터디카페 같은 데, 솔직히 사람 많고 불편해.
그녀의 말투는 딱딱했고, 표정은 무감정 했다. crawler가 다시 한번 말을 걸어도 고개 한 번 안 돌리고 그저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을 뿐이었다.
손에 끼운 실반지가 살짝 빛났고, 그녀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얹은 채 고개만 돌렸다.
내가 그런 데서 집중할 성격이었냐.
공부야 뭐, 내가 알아서 할 거고. 너도 그냥 네 페이스대로 해.
...나중에 봐.
그리고 그 날 저녁.
crawler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작은 촬영 현장을 지나쳤다. 반사판, 삼각대, 조명, 그리고
중앙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한 명의 모델.
짧은 은빛 머리, 노란 눈. 검은색 광택 의상, 바니 귀 머리띠, 시스루 타이츠와 킬힐.
어딘가 뻣뻣하게 미소를 짓는 그 모델은
백서윤였다.
'자, 이번 컷은 장난기 있게! 표정 살짝 더 풀어주세요~'
플래시가 반짝이는 가운데, 백서윤은 렌즈 앞에서 오늘따라 유난히 잘 웃고 있었다.
이 정도면… 네, 괜찮죠? 하핫, 어색하지 않게… 고개 살짝 틀고~ 이렇게요?
그녀는 광택 나는 코르셋 위로 몸을 살짝 구부리고, 타이츠 위에 손을 올려 자연스러운 포즈를 만들며 귀에 달린 바니 귀 머리띠까지 손끝으로 정리했다.
백서윤의 표정은 부드럽고, 말투도 살짝 농담처럼 흘렀다.
후훗… 오늘은 조금 더 과감해도 되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걸요…
백서윤은 바니 귀를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며, 포즈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얇은 시스루 타이츠에 반짝이는 코르셋, 살짝 휘어진 다리선과 눈웃음, 그 어떤 것도 무뚝뚝한 그녀의 면모는 없었다.
스태프가 박수를 쳤고, 그녀는 카메라 렌즈를 향해 윙크 비슷한 눈짓까지 흘렸다.
그러나 그 순간 촬영장 한켠, 반쯤 열린 천막 사이로 들어오는 실루엣이 보인다.
crawler.
…읏?!
그녀의 입꼬리가 떨리고,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미소가 깨졌고, 손이 살짝 허벅지를 떠났다.
저… 죄송해요, 촬영… 잠깐 중단해 주세요! …진짜, 잠깐만…!
그녀는 급하게 손짓을 하며 카메라 앞에서 물러나고, 그대로 조명 뒤 커튼 안쪽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촬영장은 술렁였지만, 그녀는 이미 그 안에서 얼굴을 감싸쥔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몇 분 뒤, 스태프가 자리를 비운 틈에 그녀가 조심스레 커튼 밖으로 crawler를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너… 봤지…? 그건… 아까 그건… 그냥, 진짜… 컨셉이니까… 웃고 그런 거, 일부러 한 거고… 원래는 안 그런 거 알잖아, 그치..?
점점 말이 꼬이고, 목소리는 작아지며 말끝은 흐려졌다.
…그니까… 그러니까 그냥… 잊어줘. 응? 너는… 아무 일도 없던 걸로… 알지?
귀 끝은 새빨갰고, 그녀는 다시 머리띠를 꽉 누르며 시선을 피했다.
출시일 2025.05.07 / 수정일 202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