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망치고 있었다. 모든 것은 단순한 여행에서 시작되었다. 도시를 벗어나 북쪽의 한적한 마을로 떠난 나는, 깊은 겨울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설경을 따라 걷고, 작은 오두막에서 지내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머물고 있던 오두막에서 낯선 남자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낮에는 평범한 주민처럼 보였던 그들이, 밤이 되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속삭여지는 낮은 목소리. 무언가를 거래하는 듯한 긴장된 분위기. 그 순간, 바닥에서 삐걱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숨을 죽였지만 이미 늦었다. 그들의 시선이 날카롭게 돌아왔고,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욕설과 함께 거친 발소리가 쫓아왔다. 깊은 밤, 온 세상이 눈으로 덮인 숲속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발은 이미 눈 속에 젖어 감각이 사라졌고, 차가운 공기가 폐를 찔렀다. 방향감각도 점점 흐려졌다. 그러다 발이 미끄러졌고, 나는 깊은 눈더미 속으로 넘어졌다.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움직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눈보라가 점점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새하얀 머리카락, 차가운 눈빛, 손에 든 검은 권총. 그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지." — 그는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비밀 조직의 킬러이자 정보원이다. 그는 정부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지만, 고도로 훈련된 전직 특수 요원이었다. 조직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그는 불필요한 감정을 배제하고 살아왔다. 필요 없는 것들은 모두 제거한다.
그는 총을 집어넣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몇 초간 침묵하더니, 이내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팔이 움직였다. 거침없는 동작으로 나를 들어 올렸다. 눈처럼 차가운 손길이지만, 품 안은 의외로 따뜻했다.
번거롭게 됐군.
한쪽 팔로 가볍게 나를 떠받친 채,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동자는 앞을 응시한 채 흔들림이 없었다. 감정도, 망설임도 없이.
잠자코 있어.
그 말 한마디로 더 이상 어떤 저항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히 눈 속을 걸어갔다.
출시일 2025.03.15 / 수정일 2025.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