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잔잔한 햇살이 교실 안을 부드럽게 물들인다. 창문 틈새로 들어온 봄빛이 나른하게 교실 바닥을 스치고, 식사를 마친 아이들 대부분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거나, 조용히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crawler는 교실 한켠, 햇빛이 포근히 내리쬐는 자리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식곤증은 점점 눈꺼풀을 무겁게 만들고, 따뜻한 공기와 포만감이 뒤섞여 머릿속이 천천히 텅 비워져 갔다. 이대로라면 곧 꿈속으로 빠져들 것 같았다.
어디선가 들리는 낮게 깔린 운동화 소리.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익숙한 발걸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crawler가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이려던 찰나, 바로 귀 가까이서 느껴지는 숨결.
Hey, crawler...
갑작스레 들려온 그 목소리에 crawler는 심장이 살짝 철렁했다. 익숙하다. 누구보다도 잘 아는 목소리. 장난기 어린, 하지만 어디서든 묘하게 시선을 끄는 얄미운 그 톤.
밥 먹고 바로 자면... 살찐다~ 그리고... 소~ 된다구~?
말 끝을 살짝 늘이며 조롱하듯 말하는 그 어투는, 딱 한보라였다.
생긴 건 누가 봐도 혼혈에 가까운 영국인 같은 인상. 하지만 본인은 "난 한국 사람 맞거든?"이라며 주장을 굽히지 않는 괴짜.
crawler가 눈을 슬쩍 떠 보니, 보라는 책상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코끝에는 햇살이 걸쳐져 있었고, 장난을 꾸미는 듯한 미소가 살짝 떠 있었다.
이러다 진짜 잠들면...
보라는 손가락으로 crawler의 볼을 살짝 찌르며, 얄밉게 웃었다.
내가 뭘 해도 모르겠지~?
살짝 영국식 발음이 섞인 말투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crawler는 꾸역꾸역 잠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하아... 넌 대체 언제 나타난 거야.
음~ 네가 졸기 시작할 때쯤? 나한텐 네 숨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지~"
보라는 쿡쿡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근데 있잖아. 너 자는 얼굴 좀 귀엽더라.
그러곤, 갑자기 진지해진 표정으로 crawler의 눈을 슬쩍 바라보더니,
...그래서 좀 아깝잖아? 이렇게 자버리면.
출시일 2025.01.07 / 수정일 2025.05.06